[배인준 칼럼]21세기 ‘유목민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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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30일 22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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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일하는 세종시 공무원들, 장차관과 국·과장 숨바꼭질 對面...세금 더 쓰고 對국민 서비스는 부실
22조 세종시 사업, 국정조사감, 대통령과 국회 행정혁신 責務크다...화상 국무회의-국회常委부터 하길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몸은 바쁘고 고단한데 일하는 시간은 적다. 서울 자택∼정부세종청사∼오송역∼서울역∼장차관 서울사무소. 이 동선을 오가는 공무원은 장차관을 대면해 결재 한번 받으려고 하루 네댓 시간도 길거리에서 보낸다. 총리와 장차관들은 국회 불려가고 청와대 들어가고, 국무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 부처 관련 행사들로 서울을 뜨기 어렵다. 문상(問喪)도 끊이지 않는다. 윗사람들이 주로 서울에 있다보니 실·국·과장들도 하루는 서울 하루는 세종, 오전엔 세종 오후엔 서울, 이럴 때가 많다.

장관 어디 계시느냐, 차관 어디 계시느냐, 국장 어디 있나, 과장 어디 있나, 묻고 찾는 것도 일이다. 협의 보고 결재 라인의 시간 맞추기, 공간 맞추기가 여의치 않아 속도를 잃는 정책사안도 생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발바닥엔 열이 나는데 일은 느려 터졌다. 아랫사람들은 세종에, 윗사람들은 서울에 있다보니 손잡이 없는 맷돌처럼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21세기의 ‘원시 유목민 정부’ 같다.

대처해야 할 국내외 상황은 분초(分秒)를 다투는데, 국회의 비생산성까지 겹쳐 정책은 회임기간이 너무 길고 아예 불임(不姙)인 것도 적지 않다. 일자리 하나가 목숨만큼 소중한데, 새 일자리를 만들 만한 산업들을 규제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못하는 것만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다.

국회에 장관이 출석하면 차관에 실·국장 과장까지 수십 명이 따라다닌다. 세종에서 하숙하는 공무원은 전날 서울 집에 와서 자고 국회로 가고, 세종으로 이사한 공무원은 서울 집이 없으니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상경해 국회로 출근한다. 여야가 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하염없이 몇 시간 대기하다가 장차관 이하 수십 명이 ‘밥값’도 못하고 해산하는 일도 있다. 세종청사 사무실에 처리할 일거리가 있어도 서울에 집이 있는 공무원은 내려가지 않는다. 가봐야 일과는 끝났고 보고해줄 부하도, 결재해줄 상사도 청사에 없다.

세종청사에서 자리를 지키는 중하위직 공무원들은 오후 6시가 가까워오면 퇴근버스 놓칠세라 책상 정리하고 손가방 집어 들기 바쁘다. 일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근무기강이 해이해질 소지가 널려 있다. 밤을 새워 일하던 옛날 공무원 사회의 풍경은 사라지고 있다. 공무원들은 그들대로 피곤하고 짜증나지만 행정 비효율의 피해는 국민이 본다. 150km 원거리의 무리한 통근에 잦은 출장이 행정 서비스의 질량은 떨어뜨리고 세금 부담은 키우니 국민으로서는 이중의 불이익이다.

세종시 건설에 투입되는 기본예산만도 22조 원이다. 4대강 사업 예산과 맞먹는다. 야당과 박근혜정부조차 4대강 사업을 트집 잡지만 4대강 22조 원이 더 낭비인지, 세종시 22조 원이 더 비효율인지 따져볼 일이다. 지역균형발전이 목표라면 다른 길이 많다. 감사원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사업에 대한 전면적 감사를 해서 문제점을 밝혀내고 ‘국민을 위한’ 보완책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세종청사가 빚어내는 부작용과 국민적 부담, 이런 것이 국정조사감이다.

총리실과 각 부처는 행정 비효율을 줄이겠다며 부분적으로 화상회의와 서면보고 등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고효율 행정이 될 리 없다. 정부청사를 서울 과천 대전에 이어 세종에까지 두게 된 4청사 시대의 근본적 행정개혁 방안을 찾고 실행해야 한다.

세종시 건설을 이끈 대통령과 국회부터 솔선할 일이 있다. 국무회의를 원격 화상회의로 하고, 나아가 국회의 대정부 질문과 상임위원회까지 화상회의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정보통신 세계 최강을 꿈꾸는 IT 강국인데 못할 것이 없다. 많은 부처를 세종으로 내려보냈으면 장차관부터 세종에 자리 잡고 일하도록 하는 게 상식이다.

김대중 정부 말기 반년간에도 격주로 거르지 않고 화상 국무회의를 한 바 있다.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들을 눈앞에서 지도하고 싶더라도 참고, 대통령은 서울에서 지시하고 총리는 세종에서 보고하면 된다. 서로의 표정과 눈빛까지 화상으로 다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국회의 회의라면 의원들은 여의도에서 따져 묻고, 총리와 장관들은 세종청사에서 성실히 답하면 된다. 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할 경우라면 이때도 총리는 세종청사 화상회의실에 앉아 서울청사 과천청사 그리고 청와대의 참석자들과 화상에서 만나면 된다. 원격회의를 위한 시스템은 대한민국 기술 수준이면 쉽게 완비할 수 있다. 물론 보안(保安) 시스템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화상 국무회의, 화상 국회 상임위는 하나의 상징이다. 세종청사 운영의 국민적 비용을 털어내고도 남을 의정(議政)과 국정 혁신, 이것은 오늘의 세종시를 탄생시킨 주역들이 이뤄내야 할 책무이다. 입법과 행정의 저생산 구태를 그냥 두고서 정치개혁과 민생행복을 말하는 것은 권력과 직능(職能)을 부여해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정부는 창조행정에 성공하고 나서 창조경제를 말해도 늦지 않으리.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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