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용]국제결혼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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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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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국경과 체제를 뛰어넘는 영화 같은 사랑이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탁구 스타인 안재형과 자오즈민 씨는 1984년 파키스탄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만나 5년간 비밀리에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아 갔다. 마침내 1989년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나라가 수교조차 안 한 시절이어서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삼국유사 가락본기는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온 열여섯 살 소녀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국제결혼을 전하고 있다. 허황옥은 우리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결혼 이주 여성인 셈이다. 민족 개념이 확립된 근세에는 국제결혼이 드물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변화가 시작됐다. 중국동포에 이어 동남아시아 결혼 이주 여성들이 급증했다. 오랜만에 농촌에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1990년 4710건에 불과하던 국제결혼은 2005년 4만2356건으로 늘었다. 2000년대 중반 농촌 총각의 40% 이상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국제결혼은 농촌 공동화(空洞化)를 막고 저(低)출산의 돌파구 역할을 했다.

▷사랑이 없는 국제결혼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순박한 동남아 여성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거나, 베트남 새댁이 잠적해 신랑을 애태우게 만들기도 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는 한국 남성 결혼 주의보가 내려진 적도 있다. 오죽했으면 2010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엉터리 결혼’이 생기지 않도록 잘 정비하라”고 했을까. 국제결혼은 2005년을 정점으로 2011년 2만9762건까지 줄었다.

▷정부가 월 소득이 111만6677원(2인 가구 기준)이 안 되면 결혼이민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노숙인이나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를 위장결혼에 악용하거나 무책임한 국제결혼으로 가정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과 유럽에도 있는 제도라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당장은 어려워도 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고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농촌 총각의 꿈마저 빼앗는 건 아닌지. 냉전의 벽도 막지 못했던 결혼에 국가가 관여하는 게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
#국제결혼#결혼이민 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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