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영물로 사랑 받아 온 그 많던 호랑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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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무분별 포획? 치명적 주범은 17세기 소전염병!
‘호랑이 사학자’ 김동진 씨 주장

조선시대 최고의 호랑이 그림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작품에서 드러나듯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장엄한 기상을 지닌 영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호암미술관 제공
조선시대 최고의 호랑이 그림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작품에서 드러나듯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장엄한 기상을 지닌 영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호암미술관 제공
김동진 한국범보전기금 인문학술이사.
김동진 한국범보전기금 인문학술이사.
“착하고 성스럽고 문무를 겸비했다.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 인자하다. 엉큼하면서 날래고 세차면서도 사나우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연암 박지원·1737∼1805)

연암이 극찬한 것은 선비나 장수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 영물(靈物)로 사랑받아 온 호랑이다. 조선시대까지 산신령이자 수호신으로 추앙받던 이 땅의 아이콘. 그들은 왜 한반도에서 사라졌을까.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그간 국내외 학계는 호랑이가 멸종된 주된 이유로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 정책을 꼽아왔다. 대표적인 한반도 호랑이 연구가인 엔도 기미오 일본 야조회(野鳥會) 명예회장도 1986년 저서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당시 무분별한 포획을 핵심 요인으로 봤다. 당시 일제는 농지 개간과 짐승가죽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이를 위해 호랑이를 비롯한 범, 늑대 사냥을 방조 혹은 장려하면서 조선의 야생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시각이다.

일제의 횡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이보다 병자호란 전후에 발생한 ‘우역(牛疫·바이러스로 발생하는 소의 전염병)’을 더 결정적 요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호랑이 사학자’로 알려진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의 김동진 인문학술이사(47·전 서울대 BK연구교수)는 “17세기 중국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이 기근과 겹치며 호랑이가 조선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일제의 남획을 원인으로 꼽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마구잡이로 사냥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 자료를 보면 1919∼1924년 포획한 호랑이는 65마리였다. 1년에 10마리 안팎인데, 상당수 중국 러시아와 맞닿은 함경도(40마리)에서 잡혔다. 이는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그 수가 너무 적다.

17세기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살펴보자. 1633년 무안 현감이던 신집(申楫·1580∼1639)이 올린 보고서에는 각 군현이 해마다 호랑이 가죽 3장을 바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국에 군현이 330여 개였음을 감안해 단순 계산하면 1년에 약 1000마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이 제도를 유지할 만큼 호랑이 개체는 넉넉했다. 10 대 1000. 이 엄청난 간극을 만든 원흉이 바로 우역이었다고 김 이사는 진단했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이 그린 ‘수렵도’에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이 담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이 그린 ‘수렵도’에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이 담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소현세자가 쓴 심양장계(瀋陽狀啓)를 보면 우역이 어떻게 조선에 퍼졌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인조 14년(1636년) 청나라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은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견됐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한반도를 휩쓰는데 이때 우역도 전국으로 퍼졌다. “한양에 소가 한 마리도 없다”거나 “소가 멸종할 처지에 놓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1670∼1671)까지 겹치며 한반도의 곤궁은 절정에 다다랐다.

국토의 황폐화는 당연히 호랑이 생존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랑이가 잡아먹는 사슴의 급감이었다. 소와 같은 우제류(偶蹄類·짝발굽동물)인 사슴에게도 우역은 치명적이었다. 주요 먹잇감을 잃은 호랑이의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대기근에 빠진 백성들이 산림을 파헤치고 화전을 일궜다. 호랑이는 영역과 사냥감 모두 난관에 봉착했다.

이로 인해 호랑이는 안타깝게도 최악의 선택에 빠진다. 백주 대낮에도 인가를 침입해 해를 끼치는 사고가 훨씬 잦아졌다. 결국 민관은 이전까진 나라에 바칠 때나 나서던 호랑이 사냥에 총력을 쏟기 시작했다. 이런 삼중고가 겹치며 호랑이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남은 개체들도 한반도를 떠나 시베리아 등지로 영역을 옮겨갔다.

호된 시련을 겪으며 호랑이는 18세기에 이미 희귀동물로 전락했다. 영조 4년(1728년) 왕실은 호랑이 가죽을 국가에 바치던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잡히지도 않는 호랑이 탓에 백성들의 고충만 막대하다는 판단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우역이란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휩쓸어버리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김 이사는 “병자호란 전후에 전파된 우역은 국가의 근간을 바꾸는 괴력을 발휘했다”며 “이때 호랑이는 대부분 사라졌고 겨우 명맥만 유지했는데 일제가 숨통을 끊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이달 말 한국역사연구회와 대한의사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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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소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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