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상·하원 합동 연설보다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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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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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임기 중 11번이나 한미정상회담을 해 이 부문 기록 보유자인 이명박(MB) 대통령은 2011년 10월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대미(對美)외교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국빈방문으로 워싱턴을 찾아 45분간 45차례나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삼삼하다고 한다. 2008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이었던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숙박(宿泊) 정상회담’이나 미국 의회의 이례적인 만장일치 대통령 축하 당선 결의안보다 더 영광스러웠나 보다. 미국 국내 사정이겠지만 MB 이후 합동회의 연설을 한 외국 지도자는 아직 없다.

의회 합동연설은 미 의회가 외국 정상에게 제공하는 최고의 예우다. 1874년 당시 독립왕국이었던 하와이의 칼라카우아 왕이 처음으로 연단에 선 뒤 139년간 112차례가 있었으니 1년에 한 번이 채 안 된다.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이 각각 8회로 가장 많았고, 이스라엘과 멕시코 정상도 7번씩 연설했다. 중국과 일본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연설하지 못한 반면 한국은 MB까지 5명이나 된다.

1954년 7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합동연설을 한 뒤 미국 의회는 35년 동안 한국 대통령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민주화가 안 된 국가의 지도자를 민의(民意)의 전당에 세울 수 없다는 미국 의회의 자존심이었다. 직선제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뒤인 1989년 11월에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연단에 설 수 있었다. 김종휘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은 “외교력으로 합동연설을 따냈다기보다는 미국 의회가 자발적으로 요청했다”고 털어놨다. 동시통역의 기술적 문제 탓에 노 전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고 한다.

국력이 커지면서는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MB도 2009년 6월 한미동맹 미래비전을 선포할 때는 합동연설에 실패했다. 우리 외교부와 주미대사관이 ‘풀베팅’을 했지만 전권을 쥔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의장을 움직이지 못했다. 속 시원히 불가(不可)의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만 하는 바람에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오죽했으면 우리 외교관들이 “미국 현직 대통령 만나기보다 하원의장 만나기가 더 어렵다”고 하소연했을까.

다음 달 7일 첫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찾는 박근혜 대통령의 합동연설 가능성이 회자(膾炙)된다. 미 하원의원 2명이 존 베이너 하원의장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한국 헌정사상은 물론 유교문화권 첫 여성 대통령인 박 대통령의 정치역정과 한미관계 비전을 직접 들어보자는 것이다. 아버지가 초청 받지 못한 자리에 박 대통령이 선다면 감개무량할 것이다. 성사된다면 한국의 대통령이 연달아 합동연설을 하는 진기록을 세울 수도 있다. 올해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60주년이니 타이밍도 좋다.

다만 합동연설은 대개 국빈방문과 패키지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 방문이 공식 실무방문이니 합동연설의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성사 여부는 순리에 맡겨 두는 것이 옳다. 목을 맨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보다는 첫 해외순방에 나서는 박 대통령이 출국 전후 적당한 기회에 현재 한국이 처한 안보현실을 국민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는 기회를 가지면 어떨까.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타결을 못 보고 현행 협정의 만료시한을 2년 연장하게 된 사연과 북한 핵과 탄도미사일의 위협 정도, 그리고 미국 중국 등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복안과 전시작전권 전환 일정 등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의 불안도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은 지난달 4일 매서운 안광(眼光)을 쏘며 야당을 향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달라는 담화를 발표한 뒤엔 국민 앞에 선 적이 없다. 대통령의 친절한 대국민 ‘1호 브리핑’을 고대하는 것은 필자뿐일까.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한미정상회담#상·하원 합동 연설#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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