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현진]봄옷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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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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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산업부 기자
김현진 산업부 기자
‘2013년 4월 19일. 몇 자 글로써 내 봄 옷들에 고하노라. 아깝다, 핑크 블라우스여. 어여쁘다, 화이트 셔츠여. 따뜻한 바람에 몸을 맡겨 나비 같은 자태를 뽐낼 계절, 아직도 옷장 속에 웅크린 너. 봄을 봄이라 부르지 못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뜬금없이 고전수필, 조침문(弔針文)의 문체를 빌려 옷장 속 옷들을 ‘애도’하고 싶어진 것은 속을 알 수 없는 요즘 봄 날씨 때문이다.

최근 이제야 봄이 왔나 싶어 겨우내 장롱에 보관해 둔 7분 소매 봄 코트를 입고 출근했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한창 따뜻하다 이내 냉혹한 바람을 몰아치거나, 연둣빛 4월에 갑자기 눈발을 흩날리는 하늘은 ‘멘붕’ 상태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날, 거리에선 민소매 차림의 한여름 패션과 두꺼운 코트로 휘감은 한겨울 패션이 공존하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아예 자신의 온도 취향이나 기분에 맞춰 옷을 입는 모양이다.

서울 여의도 IFC몰 관계자는 최근 열린 여의도 벚꽃 축제 덕에 평소보다 매출이 30%가량 늘었다고 전했다. 인파로 인해 자연스레 수요가 몰린 줄 알았는데 쌀쌀한 날씨 덕도 적잖았단다. 날씨가 매섭다 보니 따뜻한 실내로 찾아든 것이다.

이미 패션 업계에서는 SS(spring·summer) 시즌과 FW(fall·winter) 시즌으로 구분되는 4계절 패션 가운데 봄과 가을 패션이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가 나온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봄여름 상품을 각각 5 대 5 비중으로 만든 한 대형 패션업체는 올해 이 비중을 3 대 7로 바꿨다. 그나마 만든 봄옷들도 4계절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기본 스타일이거나, 안감 또는 소매를 탈·부착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형이다.

봄과 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은 아주 덥거나 추워지다 보니 관련 업계도 대응책 마련에 고심이다.

최근 직접 시연해 보여야 진가를 안다며 신제품 샘플을 들고 찾아온 아웃도어 업계 관계자는 봄이 아닌 한여름 제품을 갖고 나왔다. 그는 “봄 시즌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보고, 곧바로 찾아올 여름 아이템을 선보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피부 온도를 빠르게 낮춰주는 고기능성 의류를 소개했다.

비나 눈이 많이 오는 엄혹한 날씨 때문에 뜬 레인부츠와 어그부츠는 오피스레이디들의 옷차림마저 바꿔놓고 있다. 정장 스타일을 선호했던 직장여성 A 씨는 출근길, 이런 신발들을 종종 신게 되면서 여기에 어울리는 캐주얼 의류들을 잔뜩 사들였다고 말했다. 의류업계는 조심스레 ‘정장의 종말’을 우려하기도 한다.

가장 산뜻하고 아름다워야 할 봄을 잃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빼앗긴 봄의 향수를 떠올리다 보니 나비처럼 가벼워야 할 이 계절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김현진 산업부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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