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도발적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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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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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도진 연출 러 말리극장의 ‘세 자매’ ★★★★

세 자매의 대저택을 형상화한 무대세트를 원경으로 삼고 현관 포치를 주무대로 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세 자매’. LG아트센터 제공
세 자매의 대저택을 형상화한 무대세트를 원경으로 삼고 현관 포치를 주무대로 삼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세 자매’. LG아트센터 제공
레프 도진의 연극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안톤 체호프 4대 장막극을 가장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세 자매’ 속 다양한 캐릭터를 하나하나 생동감 넘치게 불러내면서 전통적 해석의 의표를 찌르는 도발적 연출을 보여줬다. 대사는 대부분 원작 그대로였지만 연기는 그 행간의 의미를 묵직하게 재해석해내 숨 가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 자매’는 원래 고인이 된 장군의 딸 세 자매의 대저택 응접실을 주요 무대로 펼쳐진다. 10∼12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도진의 ‘세 자매’는 이 저택을 형상화한 이동식 세트를 원경(遠景)으로 잡아 둔 채 그 현관 포치(porch)를 근경(近景) 삼아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공간은 4명이 간신히 앉을 정도로 좁은 데다 객석과 아주 가깝다. 따라서 올가, 마샤, 이리나 세 자매뿐 아니라 그 주변 등장인물 대부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동등하게 극을 끌고 가는 효과를 발휘한다.

국내 공연에선 보통 둘째 마샤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유부남 육군 중령 베르시닌을 중심인물로 설정한다. 하지만 다초점 렌즈로 포착한 도진의 ‘세 자매’에선 막내 이리나(예카테리나 타라소바)와 세 자매의 어머니를 짝사랑했던 늙은 군의관 체부티킨(자비알로프 알렉산드르)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보통 이리나는 격정적 사랑과 모험을 갈구하지만 실제론 지극히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건어물녀’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사교적인 귀족 출신 장교 투젠바흐와 냉소적인 솔료니 사이에서 위험한 사랑의 줄타기를 펼치는 팜 파탈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래서 그의 파멸도 더 인간적으로 다가선다.

체부티킨 역시 인생의 목표를 잃고 부표처럼 떠도는 주변부적 존재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고단한 삶의 무게’를 형상화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가 반복해 읊조리는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일 뿐”이란 대사도 처음엔 희극적으로 들리다 뒤로 갈수록 비극적 정조를 띠게 된다.

그와 더불어 후경에 머물던 저택세트가 점점 전경으로 육박해 온다. 마지막 장면 그 저택 현관지붕에 올라앉은 체부티킨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원작과 달리 회중시계를 떨어뜨린 채 죽음을 맞는다. 절망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만 해”를 주문처럼 외는 세 자매를 내려다보며.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레프 도진#세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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