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그린 태극기 교황에 내민 여학생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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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헬렌씨 바티칸 광장서 깜짝 알현
교황 끄덕끄덕… 4일후 “한반도 평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씀을 마치신 교황님께서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오시면서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그들의 기도 제목을 들어 주고 계셨다. 한 걸음씩 옮기시던 교황님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교황님이 내 옆자리에 서 있던 중국 여학생의 손을 잡았다. 이 여학생은 “교황님, 중국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나는 준비했던 태극기가 잘 보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마침내 교황님이 내 앞으로 오셨다.’

3월 27일 오전 11시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 광장. ‘태극 낭자’ 김헬렌 씨(21·사진)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20초도 채 안 되는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12일 저녁 런던 세인트팬크러스역 앞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난 김 씨는 3시간가량 인터뷰하면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 다시 한 번 감격의 여운을 느끼는 듯했다.

지난해부터 런던의 가톨릭계 기숙사에서 머물며 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김 씨. 그가 ‘유니브(UNIV)’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월 초였다. 유니브는 매년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대학생이 성주간(聖週間·부활절 일요일 전의 일주일)에 로마에서 총회를 열고 기독교 관련 문화를 체험하며 콘퍼런스를 갖는 모임이다. 김 씨는 기숙사에서 유니브 총회에 참여할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란치스코 교황을 멀리서나마 볼 기회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가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3월 23일 이탈리아를 찾았다.

“교황님의 수요 미사 전날인 26일 밤엔 잠이 안 와 기도만 했어요. 최근 부모님이 전화해 남북한 상황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거든요. 교황님께서 북한과 한국의 충돌 위기에 대해 알고 기도해 주신다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죠.”
▼ “교황께 보일 태극기… 모양 일일이 확인해 한반도 기도 요청 못했는데 마음 통했네요” ▼

김씨, 한국 첫 영세 이승훈의 8대 외손


○ 교황 “한반도 평화”를 말하다

3월 27일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김헬렌 씨(가운데)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 씨는 대성당 앞 계단 바로 오른쪽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교황과 20초간 마주할 수 있었다. 김헬렌 씨 제공
3월 27일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김헬렌 씨(가운데)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 씨는 대성당 앞 계단 바로 오른쪽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교황과 20초간 마주할 수 있었다. 김헬렌 씨 제공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매주 수요일 오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열리는 교황의 일반 알현 시간에 기숙사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잡은 곳이 대성당 앞 계단의 바로 오른쪽 ‘특등석’이었다.

그 순간 김 씨는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 있는 한국 학생은 나 혼자겠지. 어떻게 해야 교황님께 한국의 상황을 알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옆에 있던 친구가 하얀색 종이를 갖고 있었는데 저는 컬러 펜이 있었어요. 그 순간 ‘바로 태극기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정신없이 가방을 받침대로 삼아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틀릴까 싶어 휴대전화로 태극의 정확한 모양과 4개의 괘를 일일이 확인했다.

“물론 교황님께서 한반도 상황에 대해 조금은 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일은 모르실 수도 있잖아요. 교황님께 일단 태극기를 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제 앞에 오시면 한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교황이 김 씨 앞에 서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바로 직전까지 “남한과 북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혼잣말을 되뇌었건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태극기만 들었다.

“제 오른손을 잡으신 교황님은 제가 어떤 말을 할까 궁금해하시는 눈치셨어요. 그러나 저는 너무 얼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교황님의 손을 잡았던 제 손을 빼 다시 두 손으로 태극기를 들었죠. 그랬더니 교황님께서 물끄러미 태극기를 한 번 보시더니 저를 보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셨어요. 마음속으로 ‘교황님께서 내 마음을 아셨구나’ 하는 느낌이었죠.”

김 씨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 많은 후회 속에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교황에게 직접 “한국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한마디도 하지 못한 자책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기숙사 동료들과 기숙사장이 위로했지만 허탈감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31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열리는 부활절 미사에 참여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이었다.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교황은 세계 각국을 향해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김 씨는 교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광장을 빠져나가는 김 씨에게 기숙사장이 다가왔다. “헬렌, 아까 교황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니? ‘한국에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못했던 말을 교황님께서 태극기를 보고 아셨나 보다.” 순간 김 씨는 며칠간 천근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고 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무엇보다 한반도에 평화가 있기를 기원한다. 분열을 끝내고 화합의 새로운 기운이 자라나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 “제가 한국 걱정하는 게 이상해요?”

김헬렌 씨가 직접 컬러펜으로 그린 태극기. 하단에는 ‘KOREA’라는 영자와 함께 사랑한다는 의미의 하트 표시가 그려져 있다. 런던=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김헬렌 씨가 직접 컬러펜으로 그린 태극기. 하단에는 ‘KOREA’라는 영자와 함께 사랑한다는 의미의 하트 표시가 그려져 있다. 런던=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기자는 21세인 이 천진난만한 학생이 고국을 걱정하는 게 의아하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의 아버지 김형곤 씨(64)는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이고 모친 신혜선 씨(57)는 사업가.

“한국 사람이 한국의 평화를 걱정하고 기도하는 게 뭐 이상한가요? 제 가족이 한국에 있고 친구들이 군대에 가 있는데 걱정이 많이 되죠. 저처럼 신앙인이 기도하고 ‘교황님께서 한국을 위해 기도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히 바라는 건 별난 게 아닌 듯한데요.”

유럽에서도 한반도 정세의 위기 소식은 연일 신문 지면과 온라인을 차지하고 있다. 김 씨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유니브 행사에 참가한 뒤 교황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며 기자에게 보여줬다. 편지의 한 대목.

“교황님께서 부활절 주일에 한국을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현재 북한 때문에 한반도에는 긴장이 가득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평화를 위한 기도가 간절한 나라입니다. 부디 한국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꼭 한국에 오셔서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국민을 보듬어 주시고 특히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께서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조언해 주세요. 한국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이며 이승훈 성현과 여러 성현들은 순교로써 한국의 가톨릭을 지키셨습니다.”

김 씨는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의 8대 외손녀다. 이승훈은 조선 정조 때인 1783년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가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해 이듬해 조선천주교회를 세운 뒤 이벽 이가환 및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와 강론을 행하며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가져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마련했다.

○ 음악도에서 심리학도로

김 씨의 세례명은 헤레나. 헬렌이라는 이름도 세례명에서 따온 것. 성녀 헤레나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다.

선화예고에서 하프를 공부한 김 씨의 장래 희망은 심리치료사다. 고등학교 2, 3학년 때 가톨릭 단체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게 계기가 됐다. 그곳은 또래의 소녀들이 죄를 저지르고 소녀원에 가기 전에 임시적으로 보호받는 곳이었다. 김 씨는 여기서 고입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만난 소녀들은 그야말로 ‘마음이 아픈’ 친구들이었다. 대부분 부모의 보호 없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자신의 행동이 불법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책감 때문에 연일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서울에 있는 김 씨의 어머니 신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이가 좀 애어른 같아요. 어려운 사람과 힘든 친구들을 보면 고민을 많이 해요. 봉사활동을 워낙 좋아해요”라며 “부모가 자식 자랑하는 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헬렌의 작은 나라 사랑이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 나가 위기 앞에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단초라도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뭐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태극 낭자’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 신 씨의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런던=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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