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창립 25주년 맞은 서울대 노동법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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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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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 놀고 책을 편 그들, 노동자의 벗으로 우뚝 서다

서울올림픽을 100일가량 앞둔 1988년 5월 26일. 올림픽 분위기에 들떠 있던 당시 서울 도봉산 그린파크 산장에 청바지 차림의 청년, 노타이 차림의 중년 남성, 앳된 얼굴의 여성 등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후 7시경까지 모인 30여 명은 연령별 성별로 다양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들은 법학을 전공하던 서울대 대학원생과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간 예비 법조인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운동권에 몸담았던 전력을 감안하면 제법 ‘선 굵은’ 운동권 조직이 탄생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조직은 법에 기반을 둔 새로운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모임이었다.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 노동법연구회(이하 연구회)’였다.

1988년 5월 ‘노동법의 봄’

연구회 창립의 계기는 1988년에서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12월 서울 종로구의 한 허름한 다방에 20대 총각들이 자리했다. 이들은 당시 김유성 서울대 법대 교수(현 세명대 총장)의 제자들. 이날 노동법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별도의 이름 없이 그냥 ‘A팀’이라고 불렀다. A팀에는 이철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현 연구회장), 김인재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상훈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정재성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등이 참여했다. 정 변호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다.

5공화국 시절은 노동의 ‘노’자만 꺼내도 불순분자나 이적단체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이들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 달에 2, 3차례 모여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사를 공부했다. ‘영국 노동운동사’ ‘독일 노동운동사’ ‘프랑스 노동운동사’ ‘미국 노동운동 비사(秘史)’ ‘중국 노동운동사’ 등을 교본으로 삼았다. 당시엔 이런 ‘불온서적’을 들고 다니다 불심검문에 걸리면 잡혀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책들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서 구했다. 해외 서적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 경총 도서관에서 이 책들을 빌려 불법 복사해 돌려봤던 것이다.

박상훈 변호사는 당시 ‘불온서적’을 지금도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다. 그는 “사무실 옮길 때마다 많은 책을 버렸는데 이 책들은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묵은 종이 냄새가 물씬 나는 책의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당시의 치열한 ‘학습’의 흔적이었다.

A팀에는 김선수 법무법인 시민 대표변호사와 참여정부 때 대통령국민참여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주현 변호사 등도 합류했다.

1987년에는 사법연수원 18기를 중심으로 ‘B팀’이 결성됐다. 문병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김진국 법무법인 해마루 대표변호사,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다.

이같이 4년 가까운 활동을 거쳐 탄생한 것이 바로 연구회다. 회원들은 이를 ‘노동법의 봄’이라고 표현했다. 모임 이름에 서울대가 들어갔지만 사실 다른 대학 출신도 적지 않았다.

창립 당시에도 중앙대 법대 출신의 이재명 변호사(경기 성남시장)가 참여했고 이후 성균관대 법대 출신의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찰대 출신의 고태관 법무법인 리더스 변호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치열한 투쟁의 현장을 벗어난 것에 대해 외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회원들도 이를 의식했다. 김선수 변호사는 “사시 준비를 시작했던 1983년만 해도 사시 합격은 개인의 출세만을 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며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를 만나고 오면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 정도 공부를 못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박상훈 변호사는 “운동권에선 변절자로 볼 수도 있었지만 노동법을 전공한 법률가가 돼 노동자를 돕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정책은 하고 정치는 하지 말자’

연구회가 창립한 시기에는 노동법 전공자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학위도 사회법으로 받았다. 연구회는 실질적 활동을 하는 첫 노동법 연구모임이었다. 창립 이후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서울대에서 정례세미나를 열었다. 이 원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강성태 교수는 “세미나 열리는 날에는 몸이 알아서 먼저 움직일 정도”라고 말했다. 창립 3년 뒤 1991년 5월 학회지인 ‘노동법연구’ 1호를 발간했다. 사실상 첫 노동법 관련 학회지로 평가받는다.

연구회의 세미나에선 발표자와 지정 토론자들이 점잖게 의견을 나누지 않는다. 모든 참석자가 난상토론을 벌인다. 선후배간 예의는 지키지만 비판의 강도에는 차이가 없다. 새파랗게 젊은 후배가 나이 지긋한 선배의 발표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일이 예사다. 하지만 ‘뒤끝’은 없다. 김홍영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난상토론을 하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회원은 120명 안팎. 25년의 세월에 비하면 많지 않다. 조용만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형을 늘리기보다 철저하게 연구 중심의 내실을 기했다”며 “학문적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고 말했다. 올해 3월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인용색인에 따르면 ‘노동법연구’는 최근 2년간 법학분야에서 영향력지수 7위를 기록했다. 영향력지수는 논문이 인용된 횟수와 수준 등을 평가한 것이다.

전체 회원 가운데 30여 명은 교수이고 나머지는 판사 변호사 등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다. 허름한 다방에 모였던 청춘들은 이제 한국 노동법 학계 및 법조계의 ‘모세혈관’으로 퍼져나갔다. 어떤 이는 연구회를 ‘진보 엘리트의 산실’이라고 말한다. 강성태 교수는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무시되던 시대적 상황 탓에 그렇게 비칠 뿐이지 연구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연구회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시국이나 노동 현안에 대한 공식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다. 그 대신 개인 자격으로는 자유롭게 의견을 밝혔다. 이는 초대 회장을 지낸 김유성 총장의 뜻이 컸다. 김 총장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가 다른 것에 대한 포용성 부족이나 균형감의 부족 탓”이라며 “연구회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항상 조심했다”고 밝혔다. 이철수 교수는 “김 선생님의 뜻은 ‘정책은 하고 정치는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회원들은 연구회 초기의 시시콜콜한 일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박상훈 변호사를 꼽는다. 그의 꼼꼼한 메모 습관 때문. 그가 노동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4년 사법시험 2차를 본 뒤 한 달 동안 오토바이 부품 공장에서 프레스 보조 일을 한 뒤부터. 사시 합격 후 판사의 길을 걷던 그는 2007년 법복을 벗고 노동자 권익에 관한 소송에 무료로 참여하는 등 노동전문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2008년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해고당한 근로자를 무료 변론하며 대법원에서 “불법 파견이라도 기간이 2년을 넘기면 직접 고용 대상”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 사회적 반향을 불렀다. 정책으로 노동계를 발전시키자는 연구회의 취지를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아직 갈 길 먼 한국의 노동정책

세월이 지나면서 창립 멤버들은 어느덧 50대 중반이 됐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직접 노사관계 조정에 나서기도 한다. 청와대 참모로 노동현장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왕년의 ‘노동변호사’들은 억울하게 해고당한 근로자뿐 아니라 정리해고가 불가피한 기업도 변호한다.

그러나 어디서 어떤 일을 하건 한국의 노동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박상훈 변호사는 “한국의 노동정책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다가 최근 퇴보했다”며 “비정규직이나 정리해고가 늘도록 제도가 바뀌고 노사 자율성은 갈수록 억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태 교수는 “사회 전반에 걸쳐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노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고 있다”며 “특히 서로(정부 사용자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별로 바뀐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실체를 모르겠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김선수 변호사는 최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법외노조화’ 논란 등을 거론하며 “노동정책의 발전을 위해 연구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데 오히려 후퇴를 막는 데 신경을 써야 할 상황”이라며 “연구회 창립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노동정책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지금 연구회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정치적 구호나 과격한 투쟁보다 복잡한 법과 제도를 개선하고 이를 법정에서 적용하는 것이 실질적인 ‘노동 균형’을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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