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4·19 이후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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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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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박근형과 함께 계몽연극에 참여했다”

4·19 직후 서울대 재학시절 캠퍼스 벤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 앉아 있는 이가 김지하, 뒤쪽 서 있는 이가 나중에 극작가로 이름을 떨치는 김기팔 씨(작고)다. 김지하 제공
4·19 직후 서울대 재학시절 캠퍼스 벤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 앉아 있는 이가 김지하, 뒤쪽 서 있는 이가 나중에 극작가로 이름을 떨치는 김기팔 씨(작고)다. 김지하 제공
4·19는 해방 이후 시민들이 무력을 행사하는 공권력에 맞서 정부를 바꾼 ‘피플 파워’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업화가 먼저이고 다음에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화가 먼저 진행되고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시민의 힘으로 정부를 바꿨다는 자신감,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결연함 등은 이후 국민들의 유전자에 박혀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는 동력이 된다. 4·19세대의 주역은 이후 6·3한일회담반대운동, 유신반대운동의 주역으로 이어졌으며 이 힘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으로 4·19가 나던 해 대학에 들어갔던 4·19세대라 할 수 있는 소설가 김승옥의 평가다.(‘내가 만난 하나님’)

“한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 20년의 기간을 고스란히 동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4·19세대 이전에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4·19세대는 행복한 세대이다. 또 그들이 받았던 교육을 4·19로 구현시켜 볼 수도 있었던 점에서도 행복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 일이다. 김승옥의 말대로 4·19세대는 주권재민(主權在民), 삼권분립(三權分立), 정당정치(政黨政治), 페어플레이 정신 같은 것을 학교에서 배운 첫 세대였던 것이다.

자유의 바람이 불어닥친 대학가에 생기가 돌았다. 서울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대학가에는 이른바 ‘농촌계몽운동’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을 계몽해 시민의식을 높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다. 대학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자 농촌에 가서 농사일도 돕고 농민들에게 정치의식을 불어넣자는 운동이 퍼졌다.

1960년 7월 서울대 학생들은 ‘새생활운동반’ 결대식을 갖고 국민계몽대 7000여 명을 전국에 파견해 4월 혁명 정신을 보급하고 주권의식을 고양시키자고 결의했다. 이후 전국 대학마다 같은 이름의 계몽대가 만들어졌다(사월혁명회·2005년)

이들은 밀짚모자를 쓰고 가슴에 향토 계몽대 마크를 하나씩 달고 학교에서 발행해 준 학생 할인권으로 기차표를 싸게 사서 지방으로 흩어졌다. 도시에서는 수입상품 배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양담배 피우지 않기, 커피 마시지 않기 등을 내세우며 ‘민족기업 일으키자’ ‘민족산업 일으키자’ 같은 글귀가 씌어진 완장을 두르고 술집이나 가게를 돌아다녔다.

미제 물건을 팔면 압수해 모아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 네거리 한복판 같은 곳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뒤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자신들은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했지만 상인들의 반발이 컸다. 자신들이 주도해서 정부를 바꿨다는 운동권들의 엘리트 의식이 반영된 행동이었다.

서울대 미술대학도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다. 미술대학 학장을 맡고 있던 장발 교수 퇴진과 미학과의 문리대 이전을 요구하는 학생데모, 그 후 문리대에서 심리학과 종교학과 미학과를 철학과로 통폐합하려는 문교 당국의 정책에 항의하며 농성이 벌어졌다.

김지하도 어느새 농성에 가담하고 있었다. 데모는 성공했다. 문제 교수 몇 사람이 사퇴했고 미학과는 문리대로 옮겨왔으며 학생과 업무와 커리큘럼 개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하지만 농성을 주도했던 선배 예닐곱 명이 퇴학 처분됐다. 김지하는 선배들의 퇴학 처분에 심기가 뒤틀려 1960년 2학년 2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휴학했다. 그리고 서울과 원주를 왔다 갔다 하며 구름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마음을 기댔던 것은 연극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연극작품은 프랑스 티에리 모니에 작 ‘암야의 집’이었다. 수준 높은 반공(反共)작품이었는데 그는 이 연극에서 주인공을 잡으러 가는 보안관 역을 맡았다. 단역이었다.

두 번째 출연 작품은 이철향 작 ‘달빛 있는 생신’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날, 양담배 양주 등 외래 물품을 쓰지 말자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부자(父子)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김지하는 “당시 대학가에 불어닥쳤던 새생활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연극이었다. 지금은 모두 유명해진 탤런트 최불암 박근형 씨도 함께 출연했다. 나는 잠깐 무대에 등장하는 젊은 대학생 역을 맡았었다”고 전했다.

그의 세 번째 출연작은 정부와 동아일보가 지원한 ‘인촌 김성수’였다. 중앙고 출신 김기팔 씨(1937∼1991·서울대 철학과 63학번·‘해바라기 가족’ ‘정계야화’ 등으로 1970년대 유명했던 극작가)가 각본을 쓰고 동아방송 출신으로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최창봉 선생(88·전 한국방송진흥원 이사장)이 연출을 맡았다. 최불암 이로미 씨 등이 출연했다. 김지하는 단역이었지만 독립운동가로 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 고문 주필을 역임한 고하 송진우(1889∼1945) 역을 맡았다. 김지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중앙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인근 동네에서 민박을 하며 합숙을 했는데 매일 술이었다. 나는 그때 잊지 못할 세 가지 기억을 갖게 되었다. 연습이 끝나고 회식을 하면서 당시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으로부터 고하 송진우 선생의 기행들, 알려지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들과 인촌을 비롯한 한민당의 정치사적 의미, 또 인촌의 민족주의 정신과 고하와 설산 장덕수(1895∼1947·1920년 동아일보 초대주간을 지낸 독립운동가, 사상가)의 삶에 대해 전해 들었다. 내게 역사인식을 가져다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한편, 그는 당시 연극 작업을 통해 자신의 성격이 집단예술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연극의 핵심은 ‘팀워크’인데 게으름을 부리거나 대사를 까먹거나 동작 선(線)을 지키지 못하는 팀원들이 몹시 못마땅했다. 화가 나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인촌 김성수’ 연출을 맡았던 최창봉 선생이 나더러 ‘미스터 김은 연극과 안 맞아, 개인예술을 해야지 집단예술에는 안 맞아’라고 했을까.” 김지하는 이 지적이 정확한 것이었다고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떻든, 4·19혁명으로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지식인사회에서도 금기가 모두 무너졌다. 그중에 가장 뜨거웠던 이슈가 통일논쟁이었다. 철저한 반공과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평화통일론’이 고개를 들었다. 평화통일론은 1959년 7월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이 사형당하면서 폐기되어 이후 논의 자체가 금기시됐었다. 잠시, 이 대목에서 짚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죽산이다. 죽산은 누구이며 우리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계몽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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