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HSK 패스 유이균 “배움에 나이 제한이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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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2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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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균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은 중국에서 최고령 유학생 기록을 세우는 등 87세에도 만학도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1980년대 
한국배드민턴이 세계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스포츠행정가다. 잠실|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seven7sol
유이균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은 중국에서 최고령 유학생 기록을 세우는 등 87세에도 만학도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1980년대 한국배드민턴이 세계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스포츠행정가다. 잠실|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seven7sol
■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 유이균

1980∼1991 임기동안 매년 1억 이상 지원
한국 배드민턴 세계 정상 수준 이끈 산증인

2005년 중국 유학…산둥대서 공부에 도전
외국인 첫 중국 전국 서예강습 자격도 획득
“천하에 안 되는 일 없단 걸 증명하고 싶었다”


역사를 쓴 스타 선수는 은퇴 후 전설로 남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선수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되는 스타 감독도 있다. 이처럼 성공한 스타 선수와 지도자의 뒤에는 불철주야로 뒷바라지에 애쓴 스포츠 행정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포츠 행정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발로 뛰며 대한민국을 스포츠 강국으로 발전시킨 그들의 헌신은 쾨쾨한 창고 속 먼지를 뒤집어쓴 훈장처럼 잊혀지곤 한다. 그들은 때로 사재를 털기도 했고,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반납한 채 이곳저곳 누볐다. 심지어는 자신의 건강까지 바친 이도 있었다.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을 세 차례나 연임한 원로 스포츠행정가 한 명이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얼마 전 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중국에서 최고령 유학생 기록을 세웠을 뿐더러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서예강사 자격증까지 획득했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몇 가지 사항을 더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이는 87세이며, 중국어 공인 자격증의 최고봉인 중국한어수평고시(HSK) 6급 시험에 합격한 뒤 귀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유이균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었다.

유 전 회장은 1980년 제18대 대한배드민턴협회장에 취임해 1991년까지 한국 셔틀콕을 이끌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고령에도 훌쩍 유학길에 올랐을까. 또 어떤 노력을 기울였기에 중국어를 전공한 젊은 사람도 힘들다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전화로 인터뷰를 청했다. 유 전 회장은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다”며 몇 차례 망설이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정중히 답했다.

이제 잊혀진 이름. 유 전 회장을 만나기 전 당시를 가장 객관적으로 기록한 옛 신문을 찾았다. ‘배드민턴 대부 유이균 회장 눈물의 사의’(경향신문 1991년 2월 8일)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요약하면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도 10여년간 해마다 1억원 이상을 지원해 한낱 군소종목에 불과했던 한국배드민턴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유 회장이 기업의 도산으로 더 이상 지원할 재력이 없어 스스로 물러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1980년대 1억원이면 지금 10억원은 족히 됨직한 거액이다. ‘총 70억원의 회사부채를 자신의 전 재산으로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는 내용을 담은 이 기사를 끝으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신문에 오르지 않았다.

유이균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중국 유학 시절이던 2009년 획득한 서예 강사 자격증. 잠실|박화용 기자
유이균 전 대한배드민턴협회장이 중국 유학 시절이던 2009년 획득한 서예 강사 자격증. 잠실|박화용 기자

서울 석촌동 자택에서 만난 유 전 회장은 한국배드민턴을 올림픽 무대로 이끈 과거, 지난 8년간 왜 중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택했는지 등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그 어렵다는 신HSK 6급 시험에 통과했다는 것이 가장 놀랍고 궁금했다. “사업 실패 후 중국에서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금융위기 등 여러 가지 악재로 다시 실패했다. 2005년 공부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 산둥대에 지원했을 때 입학 담당자는 “60세 이상은 안 된다”며 서류를 던져버렸다. 그러나 “배움에 나이 제한이 어디 있냐?”며 물러서지 않았고, 어학 최고 코스 강의실 맨 앞에 무작정 자리를 잡았다. 다른 유학생에게 부탁해 ‘지금은 중국어로 아버지, 어머니도 모릅니다. 3개월 뒤에는 꼭 선생님 말씀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라는 쪽지를 써서 강사들에게 보여줬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를 다짐하며 3개월 동안 잠자는 것도 잊고 공부했다. “중국어를 거의 몰랐다. 개인교습도 받고 열심히 노력하니까 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운 주제를 배정받았지만 발표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자 모두들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그 열정에 산둥대 총장과 학생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TV에서 취재해 ‘모든 학생의 귀감’이라고 방송해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정도가 됐다. 이어 산둥대 본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유 전 회장은 칭화대로 옮겨 박사 과정에 다시 도전했다. 그러나 45세 이하의 연령 제한이 걸림돌이 됐다. 산둥대 총장까지 3페이지에 이르는 자필 추천서를 써주고 지도교수들도 응원에 나섰지만 칭화대의 규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유 전 회장은 이후 현지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인연이 닿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전 지역에서 붓글씨를 강습할 수 있는 자격도 획득했다. 흑룡강신문은 유 전 회장을 ‘중국이 유학생을 받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최고령 학생이자 전 세계 43개국 HSK 응시생 중 최고령자다’고 보도하며 높이 평가했다.

1926년 태어나 6·25 때 월남해 의류제조·방직공장 등으로 크게 성공했던 유 전 회장은 스포츠외교의 중심에서 배드민턴의 올림픽 종목 채택에 디딤돌을 놓기도 했다. 성공과 좌절을 모두 겪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새롭게 도전한 공부는 어떤 의미였을까. “권력자들에게 직언을 해대 손해를 많이 보기도 했지만, 협회 일을 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에 배드민턴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는 데 일조한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모든 과거를 뒤로 하고 중국에서 새롭게 도전한 이유는 내 스스로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천하에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기회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용기를 주고 싶다.” 이용대(삼성전기)의 날카로운 스매싱이 주는 폭발적인 전율과는 또 다른, 노장이 전하는 잔잔한 마음의 울림이다.

잠실|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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