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솔깃하게 풀어 헤친 ‘3000년 삶의 지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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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박스/로먼 크르즈나릭 지음/강혜정 옮김/528쪽·2만 원/원더박스

18세기 프랑수아 제라르의 작품 ‘프시케와 에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연인 프시케와 에로스의 낭만적 사랑을 표현했다. 주로 이성 간의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6가지로 구분해 다양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었다. 동아일보DB
18세기 프랑수아 제라르의 작품 ‘프시케와 에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연인 프시케와 에로스의 낭만적 사랑을 표현했다. 주로 이성 간의 낭만적 사랑에 집착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6가지로 구분해 다양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었다. 동아일보DB
탁월한 아이디어를 담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지루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책이 있다. 반면 뻔한 얘기라도 솔깃하게 풀어 내 독자들이 계속 책을 붙들게 만드는 ‘영리한’ 책도 있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문화사학자인 저자는 올해 초 국내에 출간된 ‘인생학교’ 시리즈 중 ‘일: 일에서 충만함을 찾는 법’을 쓰기도 했다. 전작에 이어 신작도 무릎을 칠 만큼 놀라운 혜안이나 해결책을 담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서 부닥치는 고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성찰해 보게끔 한다. 더불어 풍부한 글감은 저자가 다방면을 아우르며 얼마나 지독하게 독서를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에 대한 도움말 모음이다. 도움말의 출처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3000년의 ‘역사’다.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역사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세상살이의 지혜를 찾아내고 일상의 난관을 헤쳐가기 위한 교훈을 뽑는다. 주제는 사랑, 가족, 공감, 일, 시간, 돈, 감각, 여행, 자연, 신념, 창조성, 죽음 방식의 12가지.

수많은 사람이 ‘영혼의 반쪽’이 되어 줄 이성과의 낭만적 사랑을 꿈꾼다. 가족과 친구는 좀처럼 채워 줄 수 없다는 로맨스에 집착하며 외로워한다. 저자는 이를 ‘신화’이자 ‘문화 재앙’이라고 지적한다. 다양한 감정과 관계를 사랑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두루뭉술하게 뭉쳐놓은 오늘날과 달리 고대 그리스인은 사랑을 6가지로 구분했다. 불처럼 뜨거운 사랑 에로스, 고결한 우정 필리아, 가볍게 놀고 즐기는 애정 루두스, 오래된 부부가 성숙하게 사랑하는 프라그마, 모든 인간을 향한 이타적 사랑 아가페, 자기애를 뜻하는 필라우티아가 그것이다.

저자는 “현대인은 사랑에 대한 모든 욕구를 한방에 충족시켜 줄 한 사람을 찾으려 하고, 주로 이성 간의 낭만적 사랑에 집중한다”며 “고대 그리스인처럼 6가지 사랑이 공존하는 생활을 하면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 우리네 삶에 생각보다 사랑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녀 양육과 집안일이 여자 몫이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남자 몫이라는 관념이 근대에 들어와서야 퍼진 이데올로기라는 주장도 흥미롭다. 그 전에는 남녀 사이의 가사 분담이 지금보다 훨씬 평등해서 가사는 주부(主婦)가 아닌 주부(主夫)의 몫이었다는 것.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과 식민지 북미에서 경제활동은 주로 집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19세기에 공장이 생겨 남자들이 일하러 나가면서부터 남녀 역할에 고정관념이 생겼다고 한다. 저자는 “아기를 낳을 자궁과 젖을 먹일 유방을 가진 이는 여자이지만, 젖병을 소독하고 셔츠를 다리고 으깬 완두콩 요리를 하는 데는 특별히 여성유전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못 박는다.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조각 ‘키스’는 낭만적 사랑의 맹점을 보여준다. 입 맞추며 포옹하는 연인은 숨 쉴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관계 안에 갇혀 독립성을 잃고 세상에도 등을 돌렸다. 원더박스 제공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조각 ‘키스’는 낭만적 사랑의 맹점을 보여준다. 입 맞추며 포옹하는 연인은 숨 쉴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관계 안에 갇혀 독립성을 잃고 세상에도 등을 돌렸다. 원더박스 제공
속도에 대한 숭배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도 성찰한다. 실상 13세기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가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는 시간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도 별 탈 없이 잘 살았다. 마감을 뜻하는 영어단어 ‘데드라인(Deadline)’은 원래 미군 교도소 주변에 표시한 경계선으로, 재소자가 그 선을 넘으면 총살을 당했다는 정보도 있다. 매일 기사 데드라인을 지켜야 하는 기자로서 심히 오싹하다.

책 제목 ‘원더박스(Wonder Box)’는 독일의 수집가들이 여기저기서 모은 매혹적이고 진기한 물건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던 분더카머(Wunderkammer)에서 따왔다. 역사라는 원더박스를 들여다보고 배우자는 뜻. 괴테도 똑똑히 말했다. “지난 3000년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원더박스#낭만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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