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도전]컴포트화 강자 ‘안토니’ 김원길 사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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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퇴출 통보에 “月매출 16배 1억 만들면 되겠습니까”

8일 경기 고양시 안토니 본사에서 만난 김원길 대표가 디자인개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가 45년 이상 만져온 가죽과 구두 견본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다. 그는 “청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8일 경기 고양시 안토니 본사에서 만난 김원길 대표가 디자인개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가 45년 이상 만져온 가죽과 구두 견본은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다. 그는 “청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양=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978년 3월 서울 영등포역. 17세 시골 소년 김원길은 덜컥 겁이 났다. ‘큰물’에서 배우고 싶다며 호기롭게 기차를 탔지만 난생처음 본 영등포역의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그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서울 친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일자리도 없었다. 그는 충남 당진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산 작은아버지 댁에서 구두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이왕 구두를 할 거면 최고가 되어야지’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결심이 서자마자 바로 다음 날 짐을 싸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준비한답시고 머뭇거리면 집을 못 떠날 것 같았다.

영등포역 근처에 즐비한 양화점을 보니 다시 힘이 났다.

“저 구두 좀 만들 줄 아는데, 일자리 없나요?”

“봄 상품 만들 사람들은 진즉에 다 뽑았다. 딴 데 가봐라.”

바로 옆 가게로 들어갔다. 같은 대화가 반복됐다. 영등포역에서 영등포 로터리로, 또 문래동 방향으로 걸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양화점이 듬성듬성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렸다.

김원길(52)의 인생은 늘 그랬다. 언제나 새로운 문을 두드리고, 뜻한 바를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400억 원대 매출을 자랑하는 국내 컴포트화(발이 편한 신발) 시장의 강자 ‘안토니’의 사장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1일 경기 고양시 안토니 본사에서 만난 김원길은 “내 인생을 바꾼 것은 도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도전, 최고의 구두장인

17세 김원길을 받아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문래동의 작은 양화점이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일했다. 많이 먹을 나이라 끼니때마다 밥 세 공기씩을 꿀꺽 삼켰다. 석 달쯤 지나니 양화점 사장은 많이 먹는 어린 직원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게다가 구두 장사는 여름이 비수기라 일감도 적었다.

3개월도 안 돼 양화점을 나온 김원길은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가지 않았다. 여름에는 강원도 쪽 돈벌이가 좋다는 말에 무작정 7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갔다. 설악산 인근 산장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는데 산장의 손님들이 팁을 후하게 줬다. 돌아올 차비도 없었던 그는 피서철 두 달 동안 거금 55만 원을 손에 쥐게 됐다. 그 돈으로 경기 성남에 보증금 50만 원, 월세 5만 원짜리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가을이 되자 다시 구두 회사에 취직했다.

“저는 그때도 욕심이 굉장히 많아서 일단 구두 기술자가 되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나를 보고 ‘족쟁이’라고 놀리는 게 싫어 연락도 다 끊고 오직 일만 했지요.”

어느새 김원길의 구두를 납품받은 ‘케리부룩’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품질이 유독 좋았기 때문이었다. 케리부룩은 당시 잘나가는 구두 회사였다. 한참 눈독을 들이던 캐리부룩은 결국 그를 스카우트했다. 김원길은 상경 5년 만에 생산 직원만 100명이 넘는 큰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거기서도 1등이고 싶었다. 마침 전국기능경기대회가 열렸다. 원래 그의 회사에서 최고로 신발을 잘 만든다는 직원이 나가기로 돼 있었지만 회사 측의 ‘금메달 압박’에 부담을 느껴 잠적해 버렸다.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직원이 금메달을 딴 후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갈게요.”

여성화 전문이던 김원길이 남성화 부문 대표로 나가겠다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는 원래 대표였던 직원이 사라진 게 자신에게 돌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여겼다. 못하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동메달이었다. 회사 측은 크게 실망했다. 승승장구하며 자신감이 넘쳤던 그도 크게 낙담했다. 괴로운 마음에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대에서 하염없이 괴로워하다 문득 ‘파도와 바람은 수천 년 동안 노력해 기암절벽을 만들었는데, 나는 고작 70일 노력해서 1등이 못됐다고 한탄하는 게 말이 될까’란 생각이 들었다.

김원길은 “그때 금메달을 땄더라면 혼자 자만하다 더 큰 실패를 맛보았을 거고, 지레 겁먹어서 경기대회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노력에 대한 교훈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뭐든지 도전하면 얻는 게 있다”고 회상했다.

도전, 매출 20배 올리기

케리부룩에 다니면서 김원길에게 생긴 꿈은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중졸 학력이나 기능공 출신이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능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뒤 그는 더 치열하게 일했고, 1980년대 중반 그의 월급은 웬만한 대기업 부장 수준인 120만 원으로 뛰었다.

어떻게 더 많은 구두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까를 고민하던 그는 생산직에서 관리직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월급이 30만 원으로 대폭 줄어들었지만 관리직으로 가야 산업을 볼 수 있고, 그래야 사장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리직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그의 다음 도전은 영업이었다. 그건 순전히 감정적으로 결정한 도전이었다.

케리부룩은 1989년 인천의 한 백화점에 어렵사리 입점했지만 매출이 나빠 금세 철수 통보를 받았다. 사장이 꿈인 김원길 대리는 사장보다 더 열을 내고 백화점에까지 찾아가 난동을 피웠다. 한 달 만에 어떻게 철수를 시키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백화점 직원들이 보여준 영업실적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경쟁사가 한 달에 3000만 원을 벌 때, 케리부룩의 매출은 고작 600만 원이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될걸 “매출 1억 원 만들면 철수 안 해도 되겠느냐”며 큰소리를 쳤다. 깡으로 한 말이었다. 일단 한 달을 더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못하면 어떡하지’보다는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지요. 마이크를 잡고 호객행위도 하고, 전단을 뿌려 돌리고, 재고를 끌어내 파격 세일을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처럼 한 달 동안 1억1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세를 몰아 서울 백화점 상륙 아이디어를 냈다. 먼저 서울 서초구에 있는 뉴코아백화점을 공략했다. 목표 물량을 다 팔 때까진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뉴코아에서도 월 매출 1억 원을 돌파하자 콧대 높던 다른 백화점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는 어느새 회사에서 없어선 안 될 ‘영업의 신(神)’이 돼 있었다. 김원길은 회사의 물류창고가 텅 빌 정도까지 신발을 팔았다.

도전, 세계 시장

서울 백화점 진출에 성공한 뒤, 김원길은 기세등등하게 회사로 돌아왔다. 플래카드라도 걸려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놓고 “사장이 꿈이다”고 말하고 다니고, 기적 같은 영업 실적을 내니 견제 세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가 밖에서 구두 판 돈을 빼돌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문 때문에 정식 감사까지 나오자 허탈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몸 바쳐 일한 대가가 고작 그것이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90년 사표를 던지고 작은 구두 회사를 차렸다. 생산, 관리, 영업을 다 할 줄 아니 자신도 있었다. 케리부룩이 점차 어려워지자 그가 판권을 사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케리부룩이 부도난 후에 그는 극도로 쪼들리기 시작했다. 자체 브랜드는 시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95년 말, 빚만 쌓이는 가운데 은행 대출 상환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마포대교에서 자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 위기를 김원길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매일 어떻게 자금을 끌어 모을까 고민만 하다 보니 구두와 멀어졌던 거예요. 품질과 제품력이 생명이었는데 그걸 잊었던 것이지요.”

다행히 지인으로부터 급전을 빌려 다시 구두 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 수입해 팔던 이탈리아 컴포트화 브랜드(바이네르)에 “라이선스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끈질기게 전달했다. 그의 자체 브랜드 안토니도 기술력이 좋지만, 브랜드력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결국 1996년 라이선스 계약을 따냈다.

15년이 지난 2011년, 김원길은 바이네르의 상표권을 사들였다. 유럽 외의 지역에서는 마음껏 바이네르 제품을 만들고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다음 도전은 컴포트화 시장의 세계 1등이다. 그와 바이네르 구두는 9일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구두업계 최고 권위의 구두 박람회 ‘상하이 미캄쇼’에 한국 업체로는 유일하게 진출한다.

“프로라면 세계 1등의 꿈을 갖고 1등 자격이 될 만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살아 보니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더군요. 열심히 하다 보면 10년 후에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남은 도전

도전이 두렵지 않은 김원길이기에 최근 불안 속에서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특히 두드리다 보면 다른 길이 있는데, 눈앞의 계획만 짜는 것 같아 안쓰럽다.

“군대에 강연을 가면 청년들에게 꼭 ‘70년 계획을 짜라’고 해요. 대학 간 제 친구들이요? 공부 잘하고, 대기업 취업한 친구들이 지금 회사 퇴직하고 집에 있습니다. 저는 아직 꿈이 있는데요. 90세까지 살 텐데 어디에 있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고작 어느 회사에 들어가는 게 목표인 게 안타까워요.”

김원길은 그런 면에서 아버지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항상 믿어줬기에 그는 무엇인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서울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다음 날 집을 떠났고, 관리직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부서이동 신청서를 냈다.

“요즘 북한이 매일같이 전쟁을 낼 것처럼 도발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잃을 것도 많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후회 없이 살고,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누가 겁을 줘도 무서울 게 없어요.”

요즘 그에게는 “혹시 정치할 생각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는 인생경험이 담긴 책 ‘멋진 인생을 원하면 불타는 구두를 신어라’를 2011년 펴냈고, 대학과 군부대 등에서 끊임없이 강연 요청을 받고 있다. 방송사의 여러 프로그램에서 출연해달라는 부탁도 받는다.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젠 ‘명예’나 ‘자리’란 것에 눈길이 쏠리지는 않을까.

“전 노는 거 좋아해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놀고 싶습니다. 배 타는 것도 좋아하고, 봉사활동하는 것도 좋고, 먹는 것도 좋아하는데 정치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놀 거예요.”

실상은 남는 시간에 봉사활동을 많이 나간다. 어려운 시절을 보낸 그이기에 중소기업치고 기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올해도 6억 원을 예산으로 책정해 놓았다. 다음 달 7일에는 어려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효도잔치를 열 계획이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서로를 위로하자는 취지다. 김원길은 거기서 부를 노래라며 ‘뿐이고’ 한 소절을 부르며 말했다.

“가사에 있는 ‘당신’ 대신 ‘엄마’를 넣으면 할머니들이 다 쓰러질 거예요, 하하.”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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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길#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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