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용장 대통령, 약졸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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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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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정치부장
박성원 정치부장
이명박 정부 초기의 일이다. 모 부처의 국장급 인사는 대통령 보고에 배석하라는 장관의 지시를 받고 자원 및 에너지 위기와 관련한 자료를 충실히 준비했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대통령 대면(對面)보고를 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보고 자리에 가서는 이 자료를 하나도 써먹지 못했다. 입도 뻥긋할 일이 없었다. 대통령이 모든 사태를 다 파악하고 있는 듯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지시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이명박 정부도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한다.

토론이 사라진 청와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부처별 업무보고 분위기는 어떨까. 국회 상임위원회 간사 자격으로 한 보고회에 참석했던 새누리당의 모 의원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토론시간은 충분히 잡혀 있지만 정작 정홍원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관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는 어떠냐고? 오죽했으면 허태열 비서실장이 “(지시사항을) 받아쓰기만 하는 게 청와대 수석이 아니다”라고 일갈했을까.

장관과 수석들이 아는 게 없거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말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친박(친박근혜)계 한 의원은 “과거 한 동료 의원이 대통령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했다가 ‘그렇게 생각하시느냐’는 반응이 있었다. 두 번째 같은 건의를 했는데 눈길도 주지 않자 얼굴이 하얗게 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름 입바른 소리를 좀 한다는 여권의 한 인사도 “한 번은 전화로 정책과 관련해 좀 다른 말씀을 드렸는데 5초, 어쩌면 15초 정도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달 30일 당(黨)·정(政)·청(靑) 워크숍에서 정권 창출에 앞장섰던 친박계 의원들이 ‘창조경제가 무슨 뜻이냐’며 청와대 수석들을 거칠게 몰아붙일 때 수석들이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한 것은 평소 대통령과 충분한 소통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무장할 기회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이 ‘책임’과 ‘소신’을 발휘하기 위해선 ‘쫄지 말고’ 대통령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 먼저다. 불통의 상징처럼 욕먹고 있는 ‘박근혜 수첩’은 아무런 죄가 없다. 야당 시절이나 후보 시절 만났던 인물에 대한 생각 등을 메모했던 수첩은 버려야 할 어제의 유물이라기보다는 소중한 건의와 의견들을 대통령이 받아 적는 ‘소통 수첩’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파워 이론을 제창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정치,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문화 같은 ‘소프트파워’가 국가 성공에 중요하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자고 나면 위협 수위를 높이며 ‘핵 보검을 틀어쥐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을 상대할 때는 추상과 같이 엄하지만 청와대 안팎의 민심을 살피는 데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같이 따뜻하고 세심한 대통령.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보고 싶은 보통 시민들의 대통령상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강한 지도자’를 넘어 ‘무서운 대통령’으로 초반 이미지가 굳어진다면 대통령도 국민도 행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청의 ‘소통 수첩’으로

한 친박계 중진은 “조금 기다려보자.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진화해서 여기까지 온 대통령 아니냐”고 말했다. 예기치 않았던 인사 참사와 정부조직법 지연으로 늦어졌던 정부구성과 업무보고가 마무리되고 나면 국정 추진의 속도를 내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돌아볼 틈이 없었던 구석구석을 살피며 소통하는 대통령을 보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 대통령에게서 그런 용장(勇將)의 모습을 새삼 재발견하게 된다면 소신도 책임도 없이 머뭇거리는 ‘약졸(弱卒) 수석’ ‘약졸 장관’도 사라질 것이다. 그 중진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

박성원 정치부장 iam@donga.com
#부처별 업무보고#박근혜#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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