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DNA]독립투사들 법정 외침 거침없이 전달… ‘저항의 DNA’

  • Array
  • 입력 2013년 4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 역사가 된 일제강점기 보도

민족대표 48인 사진 전면에 게재… 1920년의 파격 편집



3·1운동 재판을 앞두고 민족대표 48인의 사진을 전면에 걸쳐 게재한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DB
민족대표 48인 사진 전면에 게재… 1920년의 파격 편집 3·1운동 재판을 앞두고 민족대표 48인의 사진을 전면에 걸쳐 게재한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DB
한인섭 교수
한인섭 교수
“리현준은 (눈길에 불길이 번쩍하며 몸을 부두두 떨며 분연히 일어나) ‘나는 신성한 의열단이오. 나의 형벌에 대하여서는 사형이라도 좋고, 그 무엇이어도 좋소이다. 아무말도 아니하니 재판장 맘대로 하기를 바라오’ 하고 그만 자리에 앉았는데 방청석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더라.”

1923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의열단 공판속보’ 기사가 실렸다.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파괴 거사를 치르기 위해 중국에서 폭탄과 무기를 반입하다 검거된 피고들의 최후진술, 그리고 조선인 변호사의 무죄 변론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특히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힘 있고 애절한 목소리로’ ‘분기충천한 태도로 일어서서 피가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같은 묘사는 너무도 생생해 TV 생중계 화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일제강점기에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법정투쟁은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했던 드라마였다.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재판정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제 법정에서의 공판은 자칫 일본의 법률에 의해 요식행위처럼 치러질 수 있었으나, 항일변호사가 맹활약하고 이를 속기록이나 드라마 대본처럼 생생하게 전달한 언론의 대서특필이 민심을 폭발시켰다”고 평가했다.

한 교수는 지난해 일제강점기 법정에서 활약했던 김병로(1887∼1964) 이인(1896∼1979) 허헌(1885∼1951) 등 변호사 3인의 삶을 다룬 책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경인문화사)를 펴냈다. 5년간 꾸준히 수집해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수사기록과 판결문, 신문 자료가 바탕이 됐다. 한 교수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끼는 데는 동아일보의 지면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일제 지배하에서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비밀리에 전개되거나 해외에서 진행됐어요. 그래서 독립운동가가 일경에 체포되기 전까지 민중은 잘 몰라요. 한글신문은 독립운동가의 검거와 압송 현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수사 절차를 마친 후 판사의 예심종결서가 나오면 신문에 전문을 소개해요. 예심종결서를 계기로 자체 기획 취재한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1개면에 걸쳐 크게 보도합니다. 이어 공판 날짜가 예고되고, 공판일에 방청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 눈물짓는 가족들의 인터뷰, 재판정에서의 다이내믹한 공방까지 신문에 자세히 실려요. 결국 독립운동가와 변호인의 법정투쟁은 언론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조선 민중 전체에게 독립의식을 일깨우는 좋은 기회가 되는 거죠.”

몽양 여운형 공판 당시 방청객의 쇄도로 법정의 대혼잡을 보도한 1930년 4월 10일자.
몽양 여운형 공판 당시 방청객의 쇄도로 법정의 대혼잡을 보도한 1930년 4월 10일자.
일제하 법정공판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매번 파격적인 편집으로 눈길을 끌었다. 3·1운동 재판 때는 48인의 얼굴 사진을 1개면 가득 게재했고(1920년 7월 12일자), 조선공산당 사건 때에도 관련자 99명의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1927년 4월 3일자).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에 압송된 여운형의 공판을 보도할 때는 방청객이 몰려 대혼잡을 빚는 장면을 파격적으로 편집했고(1930년 4월 10일자), 1932년 12월 27일자에는 판결을 받고 형무소로 돌아가는 도산 안창호를 바라보는 방청객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독립운동가들의 법정투쟁은 치열한 법리논쟁을 동반했다. 3·1운동 48인의 재판에서 허헌 변호사가 제기했던 ‘공소불수리론(公訴不受理論)’을 대서특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성지방법원은 사건을 다룰 법적 관할권이 없다는 허 변호사의 주장을 일제 재판부가 받아들여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 교수는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대해 “변호사들의 총력투쟁, 언론의 총력보도가 집결된 일제강점기 최대의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변호사 28인이 변론을 맡아 공판을 48회까지 끌고 갔던 조선공산당 사건에서는 형사재판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쟁점이 제기됐다. 당시 법정에서 제기됐던 피고인에 대한 호칭 문제, 경어 사용, 진술 거부, 수갑 착용, 알리바이 입증, 재판 공개, 특별 방청, 증인 신청 문제 등 각종 법률 논쟁은 동아일보 지면에 지상 중계돼 조선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급기야 1927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를 비롯한 한글신문에는 깜짝 놀랄 만한 사진이 실렸다. 허헌, 김병로, 이인 변호사가 종로경찰서의 악명 높았던 미와 경부, 요시노 경부보 등 일제 고문경찰관 5명을 폭행, 능학(凌虐·학대), 독직(瀆職) 혐의로 경성지법 검사국에 고소하고 걸어 나오는 사진이었다. 고소장을 제출한 변호사 중에는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도 포함돼 있다. 그는 2004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한 교수는 “언론의 법정투쟁 보도는 조선공산당 사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어내며,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문경찰관까지 고소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검거된 권오설, 강달영(상단 사진) 등에게 고문을 자행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찰(아래 사진)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는 김병로, 허헌, 이인 변호사(가운데 사진). 1927년 10월 18일자.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검거된 권오설, 강달영(상단 사진) 등에게 고문을 자행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찰(아래 사진)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는 김병로, 허헌, 이인 변호사(가운데 사진). 1927년 10월 18일자.
한 교수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법정투쟁은 항일변호사와 한글신문의 치밀한 합동작전의 결과물이었다”며 “이러한 변호사-언론의 합작투쟁은 법정 밖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소개했다. 즉 변호사가 피고인을 면회하고 나온 뒤 언론을 통해 경찰관의 고문 사실을 폭로하는가 하면 갑산 화전민 축출 사건, 원산 총파업, 광주학생운동 사건 때는 변호사와 기자가 동행해 실지조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1929년 8월 김병로 변호사와 동아일보 특파원 박금 기자가 함경남도 갑산 화전민의 실태를 조사하고 쓴 르포기사 ‘갑산화전민충화답사’(총 11회)가 대표적인 예다.

한 교수는 “당시 언론은 일제 당국에 의해 심하게 통제됐고, 보도가 금지된 단어들도 있었다”며 “그러나 ‘조선○○운동’ ‘비적’이란 표현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독립운동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는 없었으며, ‘중략’ ‘삭제’ 부분에 대해서도 독자들은 행간을 읽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1927년 12월 21일자 고려혁명당 사건 공판을 보도한 기사는 이렇다. “피고 정원흠은 ‘직업이 무엇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나의 직업은 ○○운동이다’고 답했고, 이원주는 ‘직업이 배일(排日)이다’고 답해 장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독립’이란 글자가 검열에서 ‘○○’으로 바뀐 것이다.

한 교수는 요즘 전국의 법학전문대학원 초청강연을 통해 학생들과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의 법정투쟁 사례에 대해 토론한다. “책과 신문을 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법조인으로서 삶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법학 연구를 위해 제게 일제하 법정을 다룬 신문 스크랩 자료를 빌려 달라는 연구자도 많습니다.”

한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5년 동안 신문 잡지 스크랩 4권, 판결문 기록 복사본 7권의 자료집을 만들어냈다. 그는 “아쉽게도 1937년 이후엔 항일변호사들의 법정투쟁 장면이 지면에 나오지 못한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가 내선일체를 강요하면서 불온한 기사 게재를 원천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발행한 모든 지면은 국사편찬위원회(history.go.kr)에서 무료로 검색할 수 있어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며 “동아일보는 나라 없는 시대에 한국인의 목소리를 기록한 당대의 사초(史草)”라고 말했다.
▼ 본보 기사 속에 살아 있는 불굴의 법정투쟁 독립혼

○ 남영덕은 (분기충천한 대로 엄연히 일어서서 피가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역시 “나는 의열단이오. 나는 일한합병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이다. 나는 조선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은 즉 나의 형벌에 대하여는 사형도 좋소이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1923년 8월 13일 의열단 공판

○ 재판장이 “너 이름은 이동구인가”라고 질문할 때, 이동구는 “어찌하여 심문할 때 경어를 쓰지 않느냐”고 항변하였다. 그는 예심판사와 기타 취조 사법관들도 경어를 쓰기로 약속했는데 재판장이 ‘너’라고 함은 불유쾌하다고 하여 심리에 공술을 거절하야 개정벽두부터 대파란이 일어났다. ―1927년 12월 20일자 고려혁명당사건

○ 이날도 새벽부터 모여든 방청객들이 도산 가족을 비롯하여 2백여 명에 달하여 정사복 경관이 엄중경계를 하였다. 이날 방청에는 중국 국민당 간부 수명이 섞여 있어 이채를 발하였다. ―1932년 12월 27일 도산 안창호 판결

○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 이외에 가장 끔찍한 고문사실은, 피고의 한 처(33세)에게 고문을 하다 못해 나중에는 음부에 심지를 꽂고 불을 질러놓아 국부에 큰 화상을 입혀 그로 말미암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신고(辛苦)하는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인공노(神人共怒)할 죄악이자 모골이 송연한 사태의 전말인 것이다. ―1924년 6월 9일자 평북 희천군 고문사건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민족대표#독립투사들#일제강점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