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 터널의 끝에서 희망을 찾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4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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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새 정규앨범 7집 ‘99’ 발매


23일 오전, 서울 합정동 YG엔터테인먼트 사옥 3층. 가요계를 들썩이던 세 남자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3인조 남성 그룹 에픽하이가 이날 3년 만의 새 정규앨범인 7집 '99'를 내놨다. 2009년 9월 발매한 6집 '[e]' 이후 3년 만에 셋이 뭉친 앨범이다.

타블로(32), 미쓰라(29), 투컷(31). 각자 바빴다. 학력 위조 논란으로 2년 반의 힘든 시간을 보낸 타블로는 작년 YG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11월 첫 솔로 앨범 '열꽃'을 내놨다. 인간관계에 대한 실망과 우울을 드러낸 극도로 어두운 앨범이었다. 투컷은 2009년 10월 결혼하고 이틀 만에 입대해 작년 8월 제대했다. 미쓰라도 지난 5월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미쓰라와 투컷도 타블로의 뒤를 이어 YG에 들어와 에픽하이로 다시 뭉쳤다.

●회색에서 총천연색으로…

기자가 이들을 만난 23일은 에픽하이 데뷔 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타블로는 "9주년을 맞아 낸 앨범 '99'에 짧은 연주곡을 빼면 9개의 트랙을 담았고 '상위 1%가 아닌 99%에 속한 사람들의 음악'을 표방했다"고 했다. '플라이' '팬' '러브 러브 러브' '원' '우산' 등을 차례로 히트시킨 이들은 최근으로 올수록 어두운 음악을 많이 냈다. 타블로의 앨범 '열꽃'은 더욱 극단적이었다. "제 솔로 앨범은 회색빛이었고 만들면서 매우 고통스러웠어요. 고통스러워 음악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런(어두운) 음악을 만들다보면 거기에 쉽게 빠지기도 하죠."(타블로)

에픽하이라는 이름으로 낸 새 앨범에는 기타와 신시사이저 소리를 앞세운 밝은 음악을 주로 담았다. 첫 곡 '업'부터 신나는 비트 위로 '오늘은 땅을 기어도 내일은 하늘 위로'라는 후렴구를 장착했다. 타블로는 "처음부터 콘셉트가 뚜렷한 앨범이었고 음악이 굉장히 밝아졌다"면서 "멤버들이 가장 그리워했을 것이 셋이 함께 하는 무대였을 텐데 팬, 관객과 웃으며 노래할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에픽 하이의 새 앨범 수록곡들은 19일 선공개돼 음원 차트 1위를 포함해 상위권을 휩쓸었다.

●터널의 끝에 있던 90년대의 기억

멤버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에픽하이라는 존재론 자체가 흔들리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어쩌면 다시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타블로가 어떤 내면을 갖고 있는지 잘 알거든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만날 때나 통화할 때도 '그 얘기'를 피했죠. 조심스러웠고, 스스로 추스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투컷) "근데 사실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게 고마운 일이에요."(타블로) 두 번째 곡 '돈트 헤이트 미'에 타블로는 '러브 앤드 헤이트. 둘 다 고맙지, 뭐.'라는 노랫말을 새겨 넣었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니까 뭉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서로를 더 아끼고 그리워하게 됐으니까요."(타블로)

타블로는 여전히 '그 얘기'를 꺼내는 걸 힘겨워했다. "2년 반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꾸준히 노력을 하고 있죠."

한때 해체설까지 돌았던 에픽하이의 재기에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역할도 컸다고 했다. "양 사장님이 '에픽하이는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팀이다. 다시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해주셨을 때 굉장히 큰 힘이 됐어요."(타블로) 타블로는 다시 에픽하이 신작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투컷과 새 노래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미쓰라가 제대하던 5월, 이미 그림은 거의 완성됐고 바로 녹음이 시작됐다.

새 앨범 '99'의 작업에는 90년대에 대한 향수가 기폭제가 됐다. 순수하게 음악에 빠져들었던 시절. "줄 사서 CD를 사고 친구 테이프를 빌려서 복사하고 라디오에서 녹음해 듣던 그 때. 음악을 업으로 삼은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그린 데이에 빠져 있던 당시를 떠올려서인지 '99'에서 이따금 얼터너티브 록의 냄새가 느껴진다. 세 번째 곡 '사랑한다면 해선 안 될 말'같은 노래에서는 신스팝(신디사이저 팝)의 발랄함도 풍겨 나온다.

소속사 선배가 된 '국제 가수' 싸이도 에픽하이의 세 어깨 근육을 풀어줬다. 며칠 전 호주와 미국 활동을 위해 출국하기 전에 '돈트 헤이트 미'라는 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에픽하이 동생들의 홍보를 도왔다. 함께 '지루할 틈 없는' 싸이 콘서트를 여러 차례 관람한 것도 "공연장에 온 관객들을 저렇게 즐겁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타블로는 "싸이 형에게 매일 전화가 온다"면서 성대모사를 했다. "어, 블로(타블로의 애칭), 올 킬 가수!(음원차트 상위권을 휩쓴 것을 말함) 음원 올 킬 가수 되더니 전화 늦게 받아~(웃음)"

DJ로서 그간 앨범 프로듀싱에서 타블로와 의견을 나눠온 투컷은 제대 후 '사회 적응' '음악 적응'이 힘들었다고 했다. "본분을 살려 클럽 디제이로 활동 영역을 넓혀볼까도 생각했다"는 투컷은 "트렌드를 따라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YG, 싸이, 그리고 에픽하이

새 앨범에서 에픽하이는 타블로와 투컷 모두 고집을 꺾고 YG엔터테인먼트의 막강한 프로듀서 군단에게 편곡을 대부분 맡겼다. 음반 전체 프로듀서는 타블로이지만 편곡은 디피, 최필강, 초이스37 등 YG 프로듀서들이 담당한 것. 이들은 타블로가 만든 멜로디, 미쓰라가 뱉는 랩, 투컷의 스크래치를 조합해 다양한 색깔을 펼쳐냈다. 타블로는 "투컷과 제가 작업하면 왠지 우울한 색채가 자꾸 나왔다"면서 "이번엔 작업 과정 자체부터 즐겁고 행복했으면 했고 처음으로 외부 프로듀서들과 함께 한 작업 과정은 과연 지금까지 중 가장 재밌었다"고 했다. "그분들과 밤샘 작업하고 홍익대 앞 고깃집에서 맥주도 한 잔 하고 부산 가서 함께 바다도 보고."(타블로) "셋이서 할 때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찼어요."(투컷)

10주년을 앞둔 에픽하이는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예전만큼 저희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는 건 저희도 알아요. 내년에 10주년 기념 공연 제대로 하려면 지금부터 작은 공연장을 돌면서 한 명 한 명씩 관객을 모아야죠."

세 남자가 출발한 곳은 휘황한 무대가 아니었다. '바닥'이었다. 홍대의 작은 클럽을 돌고 새벽 버스를 타고 불법 전단지를 뿌려가며 인디 힙합 신, 그 바닥을 돌 때는 지금 같은 조명을 상상도 못했다.

음악적 변신이 잦은 에픽하이 앞에 매 앨범마다 음악 팬들의 호불호가 갈린다. '열꽃'의 어둠에서 '99'의 밝음으로 나온 신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공포 영화 찍던 사람이 코미디를 찍는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죠. 스탠리 큐브릭처럼요. 그렇게 음악 하고 싶어요. 자유롭게, 즐겁게…."(타블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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