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부미방 30년, 민혁당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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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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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현장 씨(본보 4일자 A29면 인터뷰 참조)는 고문 후유증으로 부종(浮腫)과 간헐적인 신체마비 증세에 시달린다. 가혹행위 끝에 우울증을 얻은 한 여학생은 지금도 1년의 절반을 병원에서 지낸다. 무기수였던 김은숙 씨는 홀로 생계를 이어가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주변에서 후원금을 모으고 나섰지만 지난해 52세로 세상을 떴다.

부미방은 미국이 5·18민주화운동 진압을 묵인했다고 보고 일으킨 자생(自生) 반미운동이다. 수사당국은 부미방을 북한과 연결하려고 피의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했으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부미방 관련자 16명 중 누구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보상 청구를 하지 않았다. 1985년 대학생 70여 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사흘간 점거한 사건, 경찰관 7명이 화재로 희생된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것과 대조된다.

부미방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가위눌려 있던 운동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씨앗을 배태(胚胎)했다는 평가도 있다. 김현장 씨는 “우리가 일당 받겠다고 운동을 했나.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것도 죄스럽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의 사형수 문부식 씨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설혹 역사에 대해 청구할 것이 있다 해도 그 ‘좁은 문’ 앞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뒷줄에 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묵묵히 지고 갈 짐”이라고 말했다.

부미방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공공건물에 불을 질러 죄 없는 대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들의 표현처럼 ‘사람을 살해한 죄악을 고발하려다 사람을 죽게 한 모순된 결과’는 부미방 사람들에게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다들 자녀가 대학생이 되면 그 학생을 떠올리며 가슴을 친다. 그들은 수단도 결과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회한(悔恨)으로 숨죽이고 살았다. 부미방 30주년인 올 3월 18일도 그냥 지나갔다.

1992년 3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 결성됐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꾀한 지하조직이다. 격침된 북한 잠수정에서 민혁당 관련자와 고정간첩이 연관됐다는 증거가 발견됐다. 법원은 민혁당을 ‘국가변란을 1차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민혁당은 결성 20주년인 올해 2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이상규 의원이다. 각각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 수도남부지역사업부 총책이었던 두 사람은 공인(公人)이 됐지만 사과나 전향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김현장 씨는 부미방으로 6년 가까이 복역했다. 출감 후 10년 동안 보안관찰 처분을 받아 여행도 마음대로 못 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노부모가 살던 전남 강진의 본가는 예비군 훈련 때 가상(假想)의 적 진지로 활용됐다고 한다. 1990년대 초 김현장 씨는 주사파 후배들 앞에서 주체사상의 허상과 운동권의 빗나간 조직논리를 질타했다. 최근엔 강종헌 통진당 비례대표의 간첩 활동을 증언했다.

이석기 의원은 2002년 체포돼 2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노무현 정부의 사면·복권 조치로 1년 만에 풀려나 공무담임권과 피선거권을 회복했다. 이석기 이상규 의원은 북한 인권이나 3대 세습을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 이해하자며 싸고돌거나 “사상검증 말라”며 말끝을 흐린다. 하긴, 종북(從北)보다 종미(從美)가 더 문제라는 사람들이다. 부미방 세대와 민혁당 세대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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