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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울지마 톤즈’ 빈민촌의 코리안]<4>캄보디아서 교육봉사 이성민-김창숙 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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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울지마 톤즈’ 빈민촌의 코리안]<4>캄보디아서 교육봉사 이성민-김창숙 씨 부부

동아일보입력 2012-01-20 03:00수정 2012-01-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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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공포 이긴 희망의 교실… “한국인 첫 뎅기열 감염은 훈장” 《 “록크루! 네크루!”(남녀 선생님을 뜻하는 캄보디아어)

맨발로 논에 들어가 추수를 하던 생나 씨(61·여)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하얀 승합차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성민(55) 김창숙 씨(50) 부부가 차에서 내리자 그는 50년 넘게 벼농사를 짓느라 낫을 잡는 모양대로 굳어버린 손으로 부부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부부를 보면 정말 행복해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두 시간 가까이 달리면 나오는 캄포트 주 춤키리 군은 내전의 상흔을 그대로 안고 있는 곳이다. 이 씨 부부는 이곳에서 17년째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봉사를 하고 있다. 생나 씨의 손자 4명도 학교수업이 끝나면 이 씨 부부가 센터장으로 있는 기아대책 춤키리센터로 달려가 수업을 듣는다. 》
○ 캄보디아에 푹 빠진 신혼부부

외국계 반도체회사에 다니던 김 씨의 삶은 1988년 결혼 뒤 완전히 바뀌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간사였던 남편은 결혼 직후 내전이 치열했던 르완다와 대규모 지진이 일어난 일본 고베 등 세계 각지로 구호활동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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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초 남편은 ‘캄보디아에서 살자’고 제안했다. 수도 프놈펜에서조차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이렇다할 건물 하나 없는 황폐한 도시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 7, 8세 어린아이 수십 명이 몰려들어 “배가 고프다”며 구걸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아내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가자”라고 말했다. 김 씨는 “나는 늘 구호활동을 하러 다니는 남편이 ‘정말 멋진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 죽을 고비 숱하게 넘긴 ‘감염 가족’


지난해 12월 이성민 김창숙 씨 부부(사진 오른쪽 끝에 조끼를 입고 있는 이들)가 춤키리 센터에 다니는 유치원생들과 한자리에 섰다. 부부는 이 센터의 방과후 교실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무료로 가르친다. 무료 유치원에서는 부모가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 뒤 홀로 방치되는 유아들을 돌본다. 기아대책 제공
캄보디아에 가기 전에 죽을 고비가 찾아왔다. 1995년 7월 이 씨는 사전 답사차 캄보디아에 갔다가 뎅기열에 감염됐다. 한국인 최초였다. 뎅기열은 모기가 전파하는 뎅기바이러스에 감염돼 나타나는 급성 열성 질환이다. 일주일간 생사를 오간 그는 열병을 이겨냈고 그해 11월 무사히 캄보디아 땅을 밟았다.

이방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대학생들이었다. 돈이 없는 학생들은 절에서 자면서 승려들이 아침에 시주 받아온 음식 중 남은 것을 먹었다. 부부는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대학생 8명을 집으로 데려와 무료로 살게 했다. 2006년까지 부부의 집을 거친 대학생만 70명이 넘었다.

프놈펜에서 활동하는 한편으로 이 씨는 정부군에 패한 크메르루주군이 마지막까지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했던 캄포트 주에 내려갔다. 당시 게릴라전이 극에 달해 봉사자가 모두 철수했지만 공포 속에서도 그는 현지에 남았다.

1997년 3월 보안경계가 해제될 때까지 프놈펜과 캄포트를 오가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민들에게는 퇴비로 농사를 지어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법을 전수했다. 밤이 되면 오두막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잤다.

이후 10년 넘게 캄포트를 오가며 이 씨는 뎅기열을 네 번이나 더 앓았다. 아내와 아들 둘도 열병을 앓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부부는 “우리는 감염 전문 가족”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 10개 이상의 봉사 프로젝트


부부는 캄포트 주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인 춤키리 군에 춤키리센터를 세워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무료로 교육하고 있다. 방과후 교실에서는 아이 600여 명이 대나무 여러 개를 세운 뒤 야자수 잎을 엮어서 만든 교실에서 각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프놈펜에서는 2007년부터 기숙사 건물을 임차해 해마다 지방에서 유학 온 대학생 30명을 머물게 하고 있다. 소규모 빵공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빵도 일주일에 5000개씩 만들고 있다.

프놈펜, 캄포트 주를 오가며 많게는 10여 개 영역의 봉사를 하는 탓에 부부는 하루 20시간씩 일을 할 때도 많다. 김 씨는 자궁근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도 시간이 없어 진료를 받지 못해 결국 근종이 커져 지난해 11월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표정은 우울하지 않았다. 그는 “공부를 하겠다며 맨발로 신나게 센터에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울한 마음을 금세 다 떨쳐버렸다”고 말했다.
▼ 크메르루주 잔당 은신… 지뢰-게릴라전 몸살 ▼

춤키리 군의 아이들이 추수를 하던 중 집에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고 있다. 이 마을 아이 상당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농사일을 하며 돈을 번다. 기아대책 제공
“이미 10년 전에 학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버렸어요.”

대나무와 야자수 잎을 엮어 만든 약 9.92m²의 오두막집에서 가족 10명과 함께 사는 천 찬능 양(17)은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그를 포함해 8남매 중 3명이 초등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야자수 잎을 따거나 남의 집 논밭 일을 해주며 하루 2달러씩 벌고 있다.

그의 아버지 냇 천 씨(66)는 정부군과 크메르루주 군의 격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춤키리 군에 있는 논에서 일하다 폭격을 맞았다. 그래서 한쪽 다리를 굽히지 못한다. 귀 역시 거의 들리지 않지만 치료할 돈이 없다.

이 지역에는 정부군에 패한 크메르루주 군이 숨어들어 1990년대 말까지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장애를 가진 부모들이 많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동생들을 위해 학교를 포기하고 생계를 도와야 했다.

춤키리 군은 양측이 경쟁적으로 매설한 지뢰와 게릴라전 탓에 2003년이 돼서야 외부인의 왕래가 시작됐다. 외부와의 교류 없이 고립된 마을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가족을 총동원해 농사를 지어 생계를 겨우 유지했다. 이 때문에 자녀가 일을 돕지 않고 학교에 가는 것은 곧 생계를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초중고교 수업이 하루 3시간밖에 되지 않아 아이들은 방과 후 여전히 농사일 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버는 데 쓰고 있다.

후원금 부족으로 춤키리 군을 포함한 캄포트 주의 다섯 개 군에 설치된 센터는 학생 1500여 명밖에 못 들어가고 있다. 500명에 가까운 대기 학생 중 일부는 센터에 몰래 와 ‘도둑수업’을 듣고 있다. 게다가 이 교실도 야자수 잎을 엮어 겨우 뼈대만 세워놓은 간이 교실이어서 비가 오면 비가 그대로 줄줄 샌다. 2년이면 잎이 썩기 때문에 교실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프놈펜·춤키리=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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