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펴낸 조선광문회,3·1독립운동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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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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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출판 100년…’ 펴낸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는 “베스트셀러만 추구한 출판사들은 결국 당대에서 끝난 경우가 많다”며 “단순한 수익을 넘어 지식인의 이상을 실현해온 것이 출판의 역사”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는 “베스트셀러만 추구한 출판사들은 결국 당대에서 끝난 경우가 많다”며 “단순한 수익을 넘어 지식인의 이상을 실현해온 것이 출판의 역사”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에 루소,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한국의 근대 출판문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계몽주의 선각자들을 누군가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72)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책 문화를 이끌어 온 출판사 150여 곳과 출판인 30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정음사·사진)를 펴냈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 출판은 19세기 말 한국 천주교회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양식 인쇄기를 들여와 한글성경과 교리서를 펴낸 것이 시초가 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태동은 1910년 육당 최남선이 발족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였다. 홍명희 정인보 한용운 안창호 김성수 송진우 등 조선 지식인들을 총망라한 조선광문회는 근대식 인쇄출판과 신문학, 신문화의 요람처로 3·1독립운동의 발원지였다.

“육당은 일본에 유학 가서 간다(神田)에 있는 책방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일본의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책을 사는데, 동서고금의 책을 모두 모아 놓은 데다 ‘퇴계자성론’ ‘율곡집’ ‘성호사설’ 같은 우리나라 고전들이 다 번역돼 나와 있는 거예요. 그는 17세에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출판사를 만들었지요.”

조선광문회는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에 대한 일제의 약탈이 심화되자 우리의 고전을 수집 및 개간(改刊)하는 사업을 벌였다. ‘동국통감’ ‘택리지’ ‘율곡전서’ ‘삼국사기’ ‘열하일기’ 등 100여 권을 번역했으며 한국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사전 편찬사업도 했다. 이 사전은 일제의 탄압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고 대표는 “인촌 김성수는 조선광문회에 참여하면서 한 나라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교육과 출판, 산업 육성임을 확실하게 인식했다”며 “인촌이 창업한 동아일보는 출판계가 극심한 탄압을 받던 일제강점기에 한국 출판계의 견인차요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인촌이 민족교육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부친의 허락을 받고자 단식을 한다는 소식에 육당은 호남선 기차를 타고 인촌 집을 찾아가 부친을 설득했습니다. 육당은 3·1운동 당시 인촌이 남강 이승훈에게 5000원을 내놓으면서 거사자금으로 쓰게 했다는 사실을 제자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에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책에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광복 전후기, 6·25전쟁기, 21세기 디지털혁명기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걸어온 출판인들의 역사기록이 담겨 있다. 특히 6·25전쟁 당시 피란생활을 했던 대구 부산에서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교과서를 펴냈던 출판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자아낸다.

고 대표는 1952년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12세에 종로 보신각 주변의 영창서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고 대표는 “책을 좋아해서 날마다 서점에 들렀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얼마나 좋았던지 보수도 따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1956년 동서문화사를 창립해 55년간 출판인의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출판업은 창성은 쉬워도 수성은 어려운 사업”이라며 “출판업은 생산품이 인간정신의 소산이므로 영리만을 추구해선 안 되며 문화적인 소명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출판계가 상업적인 이익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판계가 엄혹한 근현대사 속에서도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부(富)를 추구하며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왔던 전통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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