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성욱]창의적인 실험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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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학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학
왜 어떤 실험실은 다른 실험실에 비해 더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교수가 뛰어나서 그럴 수 있고, 우수한 연구원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연구비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도 있다. 좋은 연구가 나와서 교수가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좋은 학생들이 모이며, 더 많은 연구비를 받는 식이다. 결국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원인과 결과로 맞물리면서 상승작용을 낼 때 실험실은 성공한다.

‘과학계의 보석’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 실험실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김 교수의 마이크로 리보핵산(RNA) 실험실은 ‘네이처’ ‘셀’처럼 가장 논문을 내기 힘든 학술지에 10편에 가까운 논문을 실었으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마이크로 RNA 연구를 선도하는 창의적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실험실은 초창기부터 평등하고 수평적인 인간관계라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서 공유하고 있다. 보통 다른 실험실은 ‘방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고참 학생이 있고, 이 방장이 교수의 권한을 일부 위임받아 실험실을 관리한다. 그런데 김 교수의 실험실에는 이런 권한을 가진 방장이 없다. 형식적인 방장이 있지만 이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심부름꾼일 뿐이다. 그리고 신입생이 들어오면 선배가 한 사람씩 이들을 맡아서 교육하는 ‘사수-부사수’ 제도도 없다. 박사급 연구원이 석사과정 학생에게 존댓말을 쓰며 교수부터 신입생까지 모든 구성원은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와 토론을 한다. 이러한 문화는 실험실 내에 활발한 소통과 토론을 잉태하는 요람이다.

토론-협력 유도 위해 공정성 필요

실험실 구성원 사이에 활발한 토론과 협력을 유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는 공정성이다. 자신이 낸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마치 자기 것처럼 얘기하고 다닌다면 다시는 아이디어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디어 하나하나에 ‘정체성’이 있고, 이런 정체성이 잘 인정받을 때 신뢰가 쌓이고 협력이 증가한다. 더 크게는, 논문을 낼 때 기여한 사람들의 몫을 정확하게 따져서 공정한 방식으로 저자 순서를 정하는 것이 공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기여한 만큼 인정을 받으면 연구원들은 자신의 몫을 내놓아 이를 더함으로써 실험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 공정성과 신뢰는 동전의 양면이다.

실험실을 잘 ‘관리’하는 교수는 많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연구원들이 수행하는 실험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결과는 기대했던 데이터에서 나오기보다는 예상치 않은 데이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구원들은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에 자신의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랩 미팅에서 이를 보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변칙’에 주목하는 것은 교수의 몫이다.

실험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논문이 나오기까지 보통 1년 이상, 심지어 2년이 넘는 실험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투고한 뒤에도 출판이 될 때까지는 또 1년 남짓 기다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연구팀이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도 있고, 심지어 논문을 출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연구의 방향이나 강조점을 바꾸거나 하나의 실험에 다른 실험을 더해서 가치를 증대해야 한다. 이런 결정이 발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원들이 자신이 했던 실험을 기꺼이 합쳐서 새로운 실험을 만드는 데 동의해야 한다. 국제적인 동향에도 정통해야 하지만 실험실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야 이런 전략이 효과가 있다.

최근에 김 교수의 실험실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생화학 실험에 ‘생물정보학’ 등 새로운 분야를 접목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실험실 구성원 중에는 학부에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의도적으로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소그룹의 창의성에 대한 연구들은 구성원이 균질하면 뭉치는 힘은 좋지만 아이디어 생성에서는 불리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깊이 있는 지식과 숙련을 공유해야 토론과 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창의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지식이나 숙련의 다양성과 균일성 사이에서 가장 조화로운 균형점을 잡아야 한다.

기업의 팀에도 그대로 적용

요즘 많은 기업이 ‘창의 경영’을 추구하는데, 직원이 수천 명인 기업도 실제 작업은 팀 단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의적인 팀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는 기업은 창의적인 실험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에 주목할 만하다. 민주적인 문화, 공정성, 신뢰에 기초한 협력, 참여하는 리더십, 다양성과 균질성의 조화 등은 기초과학 실험실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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