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테이션/동아논평]리멤버 1996년 공천혁명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17일 1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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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내년도 19대 총선 공천과 관련해 친이 친박 계파를 뛰어넘는 공천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에 의견을 모았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3일 청와대 단독 회동에 앞서 양측 실무진이 이 같은 공천시스템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두 사람은 그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내용입니다.

청와대와 박 전 대표 측은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나섰지만 물밑 기류는 공감대를 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청와대 박 전 대표 측이 모델로 삼는 공천개혁은 1996년 15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공천이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이듬 해 총선에서 안정적 의석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급속도로 무너질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총선 승리의 핵심 열쇠는 사람으로 잡았습니다.

각 분야의 '베스트'를 공천함으로써 국민에게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공천팀은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사람들을 발굴하고 여러 차례 정교한 여론조사를 실시해 본선 경쟁력을 점검했습니다.

이런 공천 작업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종로 지역구에 투입됐습니다.

이재오 특임장관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민중당 그룹을 영입했고, 법조계에선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와 홍준표 의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결별한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선대위 의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영입작전의 백미였습니다.

야당인 국민회의도 영입경쟁에 뛰어들었지만 다소 밀렸다는 평가였습니다.

개혁공천의 힘은 총선 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야당인 국민회의 중진들이 다진 아성은 신한국당의 정치 신인들에게 속속 무너지는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울 47개 선거구에서 신한국당이 과반인 27석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이 서울에서 야당을 제치고 1당으로 올라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김영삼 정권은 집권4년차를 안정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확보했습니다.

현재 한나라당에서 논의 중인 상향식 공천제도는 현역 의원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장치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현역의 기득권, 계파의 기득권을 깨는 혁명적 수술 없이 국민들에게 변화를 약속할 수 없습니다.

한나라당의 공천혁명이 이뤄지면 야당에도 상당한 자극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정치 지형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아논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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