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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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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동아일보입력 2011-05-25 03:00수정 2011-05-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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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4·19 이후 첫 좌익운동… 통혁당은 北지령으로 결성” “(박정희 시대 좌익운동과 관련해)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 발표된 대부분의 보도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26일 출간되는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4·19혁명 이후 좌익운동의 배경과 실상을 증언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좌익운동 이론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각 조직의 세부운동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 3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정기학술포럼에서 비공개로 증언한 내용을 이번 책에서 공개했다. 안 교수는 1980년대 중반 과거 자신의 공산주의 추종이 잘못이었다고 밝히며 공개 전향을 선언한 바 있다.

○ 인혁당은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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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의 조직 목적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그는 평가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인혁당이 박범진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이들 운동단체에 하부조직을 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박 전 의원이 인혁당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것을 상기시키며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 통혁당은 북한 지령으로 결성된 혁명조직


자생적 조직인 인혁당과 달리 통일혁명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통혁당은 북한에 혁명기지를 두고 북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청맥’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상당한 규모로 출발했다.

통혁당의 하부운동은 안 교수가 근무하던 서울대 상과대에서 가장 활발했다고 그는 밝혔다. 학생운동그룹 중에는 기독교학생운동을 하는 ‘경제복지회’가 있었는데 그 리더가 박성준 전 성공회대 겸임교수였다고 그는 전했다. 신영복 현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박성준을 지도했으며 통혁당의 서열 2위 김질락이 신영복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상과대는 통혁당 학생운동의 ‘본마당’이 돼 버렸다고 안 교수는 밝혔다.

통혁당이 발각되고 나서 가장 먼저 안 교수를 찾아온 사람은 박성준이었고, 안 교수는 자수를 하든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숨어서 지내라고 했지만 결국 그는 남산으로 붙잡혀 왔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한편 안 교수의 증언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신영복 교수의 자택과 연구실로 24일 종일 전화를 걸었지만 신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박성준 전 교수가 현재 운영하는 서점에서 휴대전화번호를 확인해 그에게도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 처벌이 과도했던 2차 인혁당 사건


안 교수는 1974년 4월 25일 발표된 2차 인혁당 사건은 인혁당을 재건하려던 좌익조직이 당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하던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지도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민청학련을 지도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게 안 교수의 평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은 이미 스스로 운동의 목표를 정확하게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분석했다.

재판 결과 인혁당은 최종적으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으로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의 학생 리더에게도 사형(7명), 무기징역(7명), 징역 15∼20년(18명)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에 대해 안 교수는 “이 같은 형량은 사법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인혁당이 재건됐다고 하더라도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형의 집행과정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다만 안 교수는 “2차 인혁당이 결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맞다”면서 “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 혁명자금 마련하려 강도짓까지 한 남민전


1979년 10월 발각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중심인물은 이재문(옥중 사망)과 신향식이었다. 이재문은 인혁당 관련 인물이고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라고 안 교수는 전했다. 이들은 한국사회를 순수한 ‘미제의 신식민지’로 인식하고 무력투쟁으로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다고 안 교수는 증언했다.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에서 북한의 재일공작원과 접선해 3억 원의 자금을 요구했다. 재일공작원은 남민전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라며 1978년 1월 초 서울시내에 삐라를 살포하라고 지령했으며 실제로 남민전은 그 지령에 따라 같은 해 1월 6월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명의로 반정부 삐라 500장을 살포했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남민전과 북한의 연합전선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이후 남민전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였고, 1979년 8월 말 서울시내에 삐라를 살포하다가 아지트가 발각됐다. 이때 이재문 김남주 이수일 이문희가 체포되고 사제폭탄 1개, 다이너마이트 1개, 권총 1정 및 실탄 150발 등이 압수됐다.

안 교수는 “이들은 처음부터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 인민민주주의운동, 즉 공산주의 혁명이 궁극적 목적이었다”며 2006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이들의 강도 행적까지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해 남민전 관련자 29명에 대해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한 것은 문제라는 견해를 밝혔다.

○ 20년간 지하 잠복했던 김정강그룹

안 교수는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김정강그룹 사건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1979년 12월에 발각된 이 조직은 구성원이 50명 정도로 꽤 큰 조직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정강은 4·19 직후부터 학생운동 리더로 활동했는데 우수한 학생운동 리더들이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도록 지도했다. 이들은 길게는 10년 정도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고 안 교수는 전했다. 이 때문에 20년 가까이 지하에 잠복하면서 세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증명할 구체적 물증이 없어 조사과정에서 대부분 석방됐고 최종적으로 2명만 재판에 회부돼 1∼2년의 금고형을 받았다고 안 교수는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민주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되던 당시 정세의 덕을 본 것이라고 안 교수는 해석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 안병직 교수는 ::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1964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
―1965∼2001년 서울대 경제학과 경제학부 교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조사받았으나 무혐의로 석방
―2001년 서울대 명예교수
―2006년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2008년 시대정신 이사장
―2009년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외교안보통일 분야)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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