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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한국의 대표적 知日 지식인 ‘지명관’ 前 한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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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한국의 대표적 知日 지식인 ‘지명관’ 前 한림대 석좌교수

동아일보입력 2011-03-21 03:00수정 2011-06-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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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바레 닛폰 캠페인, 한일관계 물줄기 바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사건”
지명관 선생은 18일 경기 안양시의 자택을 찾아간 기자에게 “이게 내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 정정하셨다. 책은 모두 한림대에 기증하고 없어 서재 대신 거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안양=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각(地殼)은 일본만 뒤흔든 게 아니다. 역설이지만, 지각은 현해탄 너머 반도(半島)의 남쪽에서도 미증유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간바레 닛폰(がんばれ, 日本). 일찍이 한민족의 땅에서 이런 기도가 공공연하게, 그리고 거국적으로 터져 나온 역사는 없었다. 감히 ‘민족’이라는 잣대로 잴 수 없는 인류애요, 측은지심이요, 이웃사랑이지만 일본을 대하는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아예 지울 수는 없는 게 또한 한일의 과거사요,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지각변동의 신호가 없진 않았다. 어느 스포츠전문기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한일전 당시 ‘붉은 악마’가 펼쳐 들었던 플래카드를 떠올렸다. ‘레츠 고 투 프랑스, 투게더.’ 절대 질 수 없는 숙적 일본팀을 향해 ‘함께 가자’고 외친 이 플래카드를 본 순간, 그 기자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붉은 악마’가 아니라, 조용기 목사를 제외한 온 국민이 ‘간바레 닛폰’을 외치고 있다. 인류애, 대한민국의 위상 변화, 한류 같은 키워드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뭔가 통시적이고, 정신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한국의 대표적 지일(知日) 지식인인 지명관 선생(85)을 찾았다. 간토대지진 이듬해 태어난 선생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쿠데타 직후 한국을 떠나 20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썼다. 1992년 8월부터 12월까지는 동아일보에 ‘일본 통신’을 연재했다. 지 선생으로부터 2011년 3월의 ‘일본 통신’을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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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기독교인이시면서 종교학을 공부하셨죠? 외국에선 간간이 종교학자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오래전 일이긴 합니다만, ‘사상계’ 주간으로 계시던 1965년 일본 ‘후쿠인토 세카이(복음과 세계)’의 부탁으로 ‘한국교회 80년의 걸음’도 집필하셨고…. 혹시 “일본 지진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의 발언 보도를 보셨습니까.

“아주 섭섭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이게 하나님의 일이다, 아니다’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기독교만 믿으면 잘 먹고 잘사는 겁니까? 그건 원시종교적인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도 있고, 믿기 때문에 풍요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세계사를 설명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유럽의 전쟁과 살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기독교는 사랑하는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요. 종교는 오늘 일어나는 일을 서사적(敍事的)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해석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의지를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누구는 복받았고, 누구는 저주받았고…. 그런 말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에 지인들이 많으실 텐데 혹시 지진 피해를 입은 분은 없었습니까.

“도호쿠(東北)대에 있는 지인들한테 전화해 보니까 괜찮다고 하더군요. 대학은 해안이 아니라 산 쪽에 있어서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도 물자가 없어서 쌀만 사 가지고 있는 대로 먹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 사회의 ‘외상후 증후군’이 심각할 것으로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 사회가 세계와 이웃, 특히 동아시아의 이웃을 다시 생각하는 일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 봅니다.

“저도 그렇게 기대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습니다. 따라서 대륙의 중국과 일본이 대립하면 우리는 항상 불행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나 임진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몽골의 일본 침략 때도 짓밟힌 건 일본이 아니라 고려였습니다. 요즘 새삼 선인(先人)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일제하에서도 선인들은 동양평화를 말했습니다. 일본이 대립하면 아시아 전체의 불행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기네 국력만 믿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국민이 일시에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선인들처럼 동양평화의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일본의 국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 밑에 깔려 있는 동양평화에 대한 갈망이 드러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선생님은 오히려 우리 국민의 반응에 놀라고, 주목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중국, 일본도 못하는 일입니다.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다주길 바라는데, 실제로 일본에 어떤 영향을 줄지 매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 언론이 역사의 방향을 잘 잡고 보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동양평화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한국에서 일고 있는 ‘간바레 닛폰’이 기미독립선언서에 담긴 그 동양평화의 정신에 닿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기미독립선언서에서 선인들은 조선의 독립이 조선의 정당한 생영(生榮)뿐 아니라 일본이 사로(邪路)에서 빠져나와 동양지지자(東洋支持者)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동양평화로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기여케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우리 선인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동양평화를 생각했겠지만, 동시에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동양평화 사상을 전파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보면 매우 글로벌한 생각이죠. 특별히 전문적인 역사 인식 없이도 우리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삶의 태도가 내면화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존과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가장 평화를 강하게 주장하는 게 한국 아닙니까. 우리에겐 동양평화의 갈망이 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동양평화를 이룩해 내는 지도국의 위치는 몰라도 주체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민주화된 국민의식으로 대하게 됐지만 중국은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중국을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이 동양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중국이 대북 문제에 있어서도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역시 일본의 변화가 관건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일국주의(一國主義)와 쇄국의 전통이 강한 나라로 비치고 있습니다. 이번 지진이 일본인의 세계인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한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제가 늘 얘기하는 일본론의 핵심이지만 일본은 무사사회의 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일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くやしければ 偉くなれ).’ 그게 약하면 깔봐도 된다는 무사사회의 전통입니다. 상대가 약해도 존중하고, 대화하는 태도는 우리보다 못합니다. 그런 전통을 생각해 보면 근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경제나 여러 면에서 한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항하는 세력이 있겠지만 이제부터 전개되는 역사는 종래의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일본 정치는 위기를 맞아서도 기동성 있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 국민은 정부가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민주당의 승리만 봐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보수)정치인들과 국민들 사이에 갭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오늘날처럼 아시아의 여론에 민감해진 적도 없습니다. 지진이 가라앉고 난 이후의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외국 언론들은 미증유의 재난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자세를 보고 매우 놀라는 눈치입니다. 사실 한국 국민들도 일본인들의 그런 정신세계랄까, 생사관을 새삼 다시 보는 분위기고….

“우리는 유교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고, 일본은 무사사회의 전통이 깊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훨씬 담백하죠. 무사는 언제나 죽을 수 있어야 하니까. 벚꽃이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 속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건 불효 중에서도 가장 큰 불효입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일본 대학에서 가르칠 때 보면 극단적인 대립이 있을 때도 절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가령 대학에서 한국인 한 사람 채용하려면 반드시 반대파가 있고, 대립이 생깁니다. 그래도 절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상대가 공격하면 바들바들 떨면서도 화를 안 냅니다. 화를 내면 바로 인간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무사사회에서 극단적 대립이 생기면 칼을 꺼내지 않습니까. 반면 우리는 서로 싸우다가도 며칠 뒤면 화해하고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 중에 변화를 위한 언론의 역할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는데 이번에 본 일본 언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전후(戰後) 식민지 상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지만 과거 일본 언론의 태도를 보면 한국의 발전상을 전하면서도 항상 ‘과연 가능할까?’라는 식으로 의문부호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론 김대중 씨 납치사건 이후 일본 언론에도 포지티브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번 지진도 한국 언론에 큰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마이너스 보도를 자제하면서 일본에도 우리에게도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본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우정 어린 자세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게 바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길입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 지명관 선생은 누구 ::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15년 연재,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계에 알려

지명관 선생의 삶에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광복 직후 쫓겨나다시피 남으로 내려왔고, 1972년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92년 6월, 꼭 19년 7개월 10일 만이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지 선생은 세카이(世界)지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싣는다.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였다. ‘TK生’이라는 필명으로, 15년간 원고지 2만 장 분량의 글이었다. 김관석 목사를 비롯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사들이 미국 선교사 등을 통해 자료를 몰래 보내오면 지 선생이 글을 쓰고, 지 선생의 글을 당시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편집장이나 비서가 필사한 다음 원고를 불태우는 식의 작업이었다. 지 선생은 2003년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편집장과의 대담에서야 실명을 공개한다. 오카모토 편집장은 “지 선생의 ‘통신’이 일본인의 한국 인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즈음 한국에 돌아온 지 선생은 한일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을 지냈다. 지 선생과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 같은 학년이었다. 지 선생은 종교학과, 김 전 대통령은 철학과. 학교를 다닐 땐 노트도 서로 빌려 봤다. 김대중 정부 때는 KBS 이사장,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취임사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노무현 그룹의 ‘끼리끼리’에 실망해 이후엔 거리를 뒀다고 했다.

요즘은 경기 안양시 자택에서 한일 양국의 시가(詩歌)를 비교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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