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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온돌서 조선문화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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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온돌서 조선문화가 태어났다

동아일보입력 2010-12-04 03:00수정 2010-12-04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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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의 근대사/권석영 지음/266쪽/2만5000원/일조각
1930년대 일본 간토지방 조후시 가미이시하라에 형성된 조선인 부락. 정면에 있는 가옥 벽면의 그을음(점선 안)은 벽에 설치된 굴뚝으로 연기를 내보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한 뒤에도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일조각
“온돌은 조선 문화의 ‘태반(胎盤)’이자 ‘자모(慈母)’다.”

1928년 민속학자 손진태는 ‘온돌예찬’에서 온돌을 이렇게 규정했다. 한복은 일상적으로 입지 않아도 온돌은 현재까지 대부분 한국 주택에서 사용되고 있다. 온돌은 근대 이후 서구화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전 시대와 전 지역을 포괄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생활문화인 셈이다.

그러나 이 조선 문화의 ‘뿌리’는 땔감 마련을 위해 전국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린 국토 황폐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때때로 외국인들은 뜨끈한 방 안에서 등을 지지는 조선인을 보며 ‘게으르고 태평스럽다’고 평하기도 했다.


일본 홋카이도대에서 일본근대사와 한국문화사 등을 강의하고 있는 저자는 이 같은 모순은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기, 즉 근대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온돌 연구는 대부분 구한말 이전과 광복 이후에 집중돼 있었다. 저자는 “19세기 말에서 식민지 시기에 걸쳐 온돌은 이방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며 온돌의 근대사를 써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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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생활은 칩거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진취의 기상을 상실케 하는 해독이다… 대체로 한인은 저능자다. 그 주거가 온돌이듯이 그 머릿속도 온돌처럼 바람이 안 통하고 어둠침침하다.”

한일강제병합 전 ‘조선만화’라는 책에 실린 글의 일부다. 기후가 따뜻한 일본에서 본격적인 난방장치가 없었던 일본인에게 온돌은 낯선 문화였다. 온돌을 북방 진출을 위한 난방법이라고 평가한 일본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인은 이같이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일본 홋카이도 지방에서 개발됐던 다카스기식 온돌의 부뚜막. 일본식 솥이 걸려 있다.
온돌에 대한 타자의 평가는 온돌을 사용해온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평범한 일상이었던 온돌은 조선의 상징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손진태처럼 온돌이 “표면으로는 우민과 비애를 가졌으면서도 내적에는 한없는 인정미를 속 깊이 가진 조선 문화, 조선인의 민족성을 형성해왔다”며 예찬하는 이도 생겼다.

“산림의 대숙적” “너무나 횡포한 연료 강요자” “민둥산을 제조하는 장본인”….

한일강제병합 직전 일본인들의 글에 등장한 온돌에 대한 묘사다. 구한말 산림 황폐화의 주범으로 온돌을 지목하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인식은 오해라고 강조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산림 황폐화에 관한 기록이 17세기, 즉 임진왜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전란으로 산림이 훼손된 데다 피란민들의 산림 개간, 전란 이후의 복구 등 다양한 원인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온돌문화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제는 상당수 산림을 국유화하고 이용을 제한했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목숨을 걸고 땔감을 훔치거나 돈을 내고 사야 했다. 어떤 산에서든 땔감 채취가 가능했던 과거와는 대조적이었다. 온돌이 땔감을 낭비한다고 보고 온돌문화를 ‘개량’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찬밥 먹기, 쇠죽 쑤기 금지는 물론 두꺼운 이불을 사용하도록 침구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아궁이와 굴뚝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개량분구(아궁이)’ 설치를 강제하고 돈을 지불하도록 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온돌의 경제성이 낮아지면서 왕겨와 연탄 등 대체연료를 개발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저자는 이 같은 대체연료 보급에 재조선 일본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이들이 추운 조선의 겨울에 적응하는 데 온돌은 필수였다. 그러나 재래식 온돌에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대체연료 도입이나 온돌 개조에 적극적이었고, 이것이 조선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체연료와 개조 온돌이라는 관점에서 확인되는 온돌의 근대에는 선도 악도 없고 공과도 없는, 오직 온돌이라는 생활문화가 영위되는 식민지 공간이 보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조선 땅에서 굴곡을 겪던 온돌은 바다를 건너 타지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해외로 이주한 조선인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운 홋카이도 개척, 만주 진출을 위해 일본 정부나 군에서 온돌 도입을 추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홋카이도에서 온돌은 매력적인 난방법이었다. 1930년대에는 여름에는 부뚜막과 연도 사이에 차단판을 내려 취사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다카스기식 온돌이 개발돼 주목받았다. 이 집에서 시험적으로 거주한 뒤 작성된 보고서는 “거실의 온돌이 발산하는 따스함에 항상 봄처럼 편안하고 느긋하게 사는 기분은 겨울을 먼 현실 속의 꿈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개조 온돌은 현재 홋카이도에서 ‘온도루’ 혹은 ‘온도루시키’로 불리며 명맥을 잇고 있다.

이 같은 시도에도 일본에서는 끝내 온돌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1930년대 ‘유카단보’로 불리는 바닥 난방법이 개발됐다. 서양의 복사식 난방을 본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20, 30년 동안 관찰하고 연구해온 온돌이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카단보 역시 기술적 문제와 비용 때문에 일본에서 일상적인 난방법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저자는 “새로 집을 지으면 당연히 모든 방을 온돌로 완비하는 현대 한국의 온돌문화가 얼마나 특징적인지 알 수 있다”며 “현대 한국의 온돌은 오래 입어서 몸에 익숙해진 평상복”이라고 말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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