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 20선]<16>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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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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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박천홍 지음/현실문화

“바다에 양도깨비들이 떠 있다”

《“우리의 근대는 바다를 건너 침투해 왔다. 거대한 군함은 악령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오싹했다. 대포와 총은 금세라도 불을 내뿜을 것 같았다. 군사들은 기계의 화신인 양 무자비했다. 조직화된 폭력으로 무장하고 현해탄을 넘어온 근대 일본의 격랑 앞에서 조선 왕조는 난파당하고 말았다. 그 난판의 잔해들은 지금도 우리의 바다를 떠돌고 있다. 그것은 불구적이고 기형적인 우리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으로 기록된 인물은 국적 불명의 서양인 ‘마리이(馬里伊)’였다. 그는 바다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선조수정실록’ 1582년 1월의 기록엔 “요동 금주위 사람 조원록 등과 복건 사람 진원경, 동양 사람 막생가, 서양 사람 마리이 등이 바다에서 배로 우리나라에 표류해 왔다”고 나와 있다. 이 기록에서 동양 사람은 동남아시아인을, 서양 사람은 포르투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마리이와 막생가가 1582년 제주도로 왔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표류로 시작된 조선과 서양의 만남은 18세기 들어 의도적인 방문으로 형태가 달라졌다. 1797년(정조 21년) 음력 8월 27일 묘시(오전 5∼7시), 부산 동래의 구봉 봉수대(오늘날 부산 동구 초량동)를 지키던 한 병사가 수상한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코가 높고 눈이 푸른 그들과 일본어 통역관, 한어(한족의 중국어)와 청어(청나라 언어)를 하는 사람이 필담을 나눠보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만 쓰시마 섬 근처를 가리키며 입으로 숨을 후 내쉬는 그들의 몸짓 등으로 그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것으로 파악했다. 조선 관리들은 그들을 관찰해 여러 기록에 “배에는 50명이 타고 있었다. 모두 머리를 땋아 늘어뜨렸다. 그들이 쓴 글씨는 마치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해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배에는 유리거울, 유리병, 망원경, 구멍 없는 은전 등이 있었다”고 남겼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 사람으로 짐작했지만 사실은 영국인이었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 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 부근을 측량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산항의 지도를 그려서 ‘초산항’(조선을 지역명으로 착각해서 붙인 이름)이란 이름으로 영국 해군에 제출했고, 우리 언어에 대해서도 ‘A man=Sanna(사내)’, ‘The eye=Noon(눈)’, ‘A tree=Sonamo(소나무)’ 등 38개 단어를 항해기에 남겼다.

18세기 들어 조선의 바다에는 서양 배들의 출몰이 잦았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처음에는 측량 등 지리적 탐사가 목적이었지만 19세기 중엽부터는 점차 통상과 선교, 식민지로서의 가치판단 등을 위해 조선의 바다로 접근했다. 1832년(순조 32년) 로드 애머스트호를 타고 온 독일인 귀츨라프는 조선을 찾아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다. 1845년 제주도를 찾은 영국의 사마랑호는 조선의 관리를 인질로 잡기도 했다. 제국주의적 행태의 절정은 이듬해인 1846년 프랑스 군함인 세실호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난 사건이다. 잘 알려진 대로 1839년 기해박해를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가 원정함대를 파견한 것이다.

저자인 박천홍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은 “서양인들이 위압적인 행위를 했고 중국이 이양선에 의해 억지 개항돼 궁정까지 불탔다는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접촉 초기와 달리 이양선은 조선 사람들에게 악령으로 비쳤다”며 “바다는 개방의 통로가 될 수 있었으나 이런 부정적인 인식으로 결국 쇄국 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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