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상황 심각… 정전협상 빨리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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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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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4일 김일성-스탈린-펑더화이 긴급회의
美윌슨센터 대화록 입수

1952년 9월 옛 소련에서 스탈린, 김일성 그리고 당시 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만나 나눈 대화록 사본.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소련 극비문서를 발굴해 영어로 번역했다.
1952년 9월 옛 소련에서 스탈린, 김일성 그리고 당시 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만나 나눈 대화록 사본.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소련 극비문서를 발굴해 영어로 번역했다.
6·25전쟁이 2년 넘게 진행 중이던 1952년 9월 4일 옛 소련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주재로 펑더화이(彭德懷) 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김일성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불가닌 등 옛 소련 공산당 수뇌부가 모두 배석했고 중공에서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외교부장이, 북한에서는 박헌영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나섰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미 공군의 후방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날 회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스탈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물었고 식량지원 및 전쟁물자 보급을 약속하면서 이미 시작된 미국과의 정전협상에 대해 북한과 중공 간에 이견이 있는지에 관심을 표명했다.

김일성은 “원칙적으로 생각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선의 인민들이 스스로 처하게 된 심각한 상황을 볼 때 정전협상이 최단기간에 결론에 이르기를 원한다. 내 생각에 중국도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공 국가주석과도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은 15일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한 ‘스탈린-김일성-펑더화이 대화록’을 통해 밝혀졌다.

▼스탈린 “北 인민들 빵도 먹느냐”…자존심 굽힌 金 “밀가루 사랑해”▼

포로 강제송환 고수했던 스탈린
“여의치 않을땐 20% 양보하라”

1954년 미국 CIA 작성 문건
“北 재남침땐 北-中에 원폭투하”


본보가 입수한 자료는 우드로윌슨센터가 발굴해낸 옛 소련 극비문서 중 하나이며 우드로윌슨센터는 이날 총 500페이지에 이르는 127점의 문건을 공개했다. 미국의 우드로윌슨센터와 해리트루먼도서관, 중앙정보국(CIA)은 16, 17일 양일간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 시에 위치한 트루먼도서관에서 6·25전쟁 6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연다.

전쟁 수뇌부 3인의 대화록에는 한때 승리를 눈앞에 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 대해 김일성이 갖고 있는 초조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김일성은 “적군의 폭격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공화기의 보강이 절실하다. 얼마 전에 5개 연대의 대공화기 부대의 보강을 요청했지만 현재로서는 10개 연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어 식량상황을 물으며 “빵도 먹느냐, 아니면 쌀만 먹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김일성은 자존심을 다 팽개친 듯 “가장 어려운 시기에 5만 t의 식량을 선물로 보내준 것에 감사한다. 조선인민은 밀가루를 사랑한다”고 말한 뒤 “차량과 트랙터 그리고 화학비료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 중 자유세계에 남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송환을 하지 않겠다는 ‘자율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스탈린은 모든 포로는 전쟁이 중단될 경우 본국으로 무조건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송환’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에 입수한 대화록에서 스탈린은 “미국이 제시한 포로송환 원칙에 응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에는 모든 전쟁포로의 송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양측에서 20%에 한해 포로송환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원칙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전쟁으로 자국의 인명피해가 심각해지는 중공이나 북한에 비해 스탈린은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도 이번 문건에서 확인됐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번에 공개된 대화록은 소련이 북한과 중공의 지도부를 독려하고 전쟁물자를 제공하면서 전쟁의 모든 상황을 사실상 원격지휘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고 말했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야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50년 5월 6일자 ‘남한에서의 빨치산 운동에 대한 보고서’도 눈에 띈다. 북한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보낸 이 전문의 저자는 국군의 공세 속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빨치산 김달삼. 1948년 제주 4·3사건을 지휘한 김달삼은 1950년 3월 월북해 남한 내 빨치산 투쟁의 문제점을 자아 비판했다. 그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격적인 투쟁을 벌이지 못한 점을 꼽았고 1949년 8월과 9월이라는 시점에 남한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 점을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반성했다. 김달삼이 공개한 1950년 6월 당시 빨치산 병력은 △서울 50명 △경기도 90명 △강원도 1010명 △전라북도 300명 △전라남도 1250명 △경상남도 500명 △경상북도 2050명 등 모두 5250명이었다.

한편 정전협정이 이뤄진 뒤인 1954년 3월 CIA가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이 다시 남침할 경우 북한은 물론 중국에까지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지린(吉林), 선양(瀋陽), 칭다오(靑島), 시안(西安), 톈진(天津) 등 5곳을 타격 목표로 삼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소련이 자유항구로 관리하던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제외됐다. 또한 CIA는 6·25전쟁 발발 엿새 전인 6월 19일 북한은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없는 만큼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돌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초대 CIA 국장인 로스코 힐렌코터(1982년 사망)가 그해 10월 7일 CIA 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인디펜던스(미주리 주)=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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