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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이 존경받는 사회]<1>박동혁 병장 부모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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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이 존경받는 사회]<1>박동혁 병장 부모의 눈물

동아일보입력 2010-05-24 03:00수정 2010-05-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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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교전중 전우 돌보다 온몸 찢겼는데 공무상 사망이라니…”
84일 병상사투 벌인 아들
복부 - 어깨에 파편 100여개 인공호흡기 떼자 “살려줘 엄마”

소 키우며 상실감 달래는 부모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명예회복 외엔 바랄게 없어”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응원의 함성 뒤편에서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고속정 참수리 357호정이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우리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참수리정은 침몰했다. 영결식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부 장관도, 여야 대표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을 내세워 제2연평해전을 애써 외면했고 언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울분을 삼키며 지난 7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기념행사로 격상해 추모하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명예회복의 길은 멀다. 동아일보는 “우리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자성을 하면서 전사자 6명의 영웅적인 활동과 가족들의 힘겨운 삶을 추적해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의 명예를 살리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제2연평해전에서 동료들을 돌보다 전사한 의무병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왼쪽)와 어머니 이경진 씨가 19일 강원 홍천군 동면 자택에서 박 병장과의 추억이 담긴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다. 두 사람은 박 병장 사진과 관련 기사 등을 모아둔 별도 방을 마련했다. 홍천=전영한 기자
“9시간 동안의 대수술이었습니다. 왼쪽 다리의 대동맥이 끊어졌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복부 등에 포탄 파편 100여 개가 박혔습니다. 소장 7군데를 꿰맸고 대장은 모두 망가졌습니다. 척추에도 파편이 박혀 있습니다. 3도 화상을 입은 곳도 있습니다. 출혈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002년 6월 30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무장교가 박동혁 병장의 수술 경과를 설명하는 동안 어머니 이경진 씨(54)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전날 황급히 병원에 도착한 이 씨는 30일 새벽에야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의 몸에서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팽팽하게 부어오른 배와 다리, 시커멓게 그을린 몸. 이 씨는 붕대로 칭칭 감긴 이 청년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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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도 좋으니 차라리 내 대장을 동혁이에게 이식해 줄 수 없을까요”라고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전우 돌보다 피격돼

박 병장은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해군 제2함대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 공격을 받고 적탄이 쏟아지는 함정 위에서 부상한 전우들을 돌보다가 그도 끝내 총탄과 포탄 파편 세례를 받았다.

면회는 20분씩 하루 6회만 허용됐다. 박 병장은 입원 사흘째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가 다음 날 갑자기 심장박동이 멈췄으나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되살아났다. 의료진은 “의식을 찾으면 고통과 부상의 충격으로 쇼크사할 수 있다”며 수면제를 투여해 박 병장을 재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박 병장의 왼쪽 다리가 발가락부터 검게 썩기 시작했다. 입원 열흘 만에 의료진은 박 병장의 왼쪽 허벅지를 절단했다. 배 속의 포탄 파편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래도 이 씨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이 퇴원하면 요양을 시키려고 국민이 모아준 성금으로 강원도의 한 산골에 집터도 마련했다.

입원 한 달이 지나 박 병장이 깨어났다. 박 병장은 왼손으로 의무병의 손바닥에 글을 써 의사를 표현했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박 병장이 왼손으로 다리 쪽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엄마, 잠에서 깨어났는데 다리가 없어져 버렸어.”

박 병장은 중환자실에서 밤새 통증에 시달리며 오전 7시에 면회 올 부모를 기다렸다. 알 수 없는 기계들과 22개의 링거에 둘러싸인 채 아들은 고개를 돌려 이 씨를 향해 억지로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왼쪽 다리가 너무 아파, 주물러 줘. 엄마.” “엄마, 죽은 대장님(윤영하 소령)이 와!” 박 병장은 사지가 절단된 뒤 없어진 신체 부위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환지통(幻肢痛)과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래도 그해 8월 20일경에는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떼자 말도 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집 거실에서 엄마 아빠랑 놀 수 있을까? 살려줘. 엄마, 죽고 싶지 않아. 집에 데려다 줘.”

9월 1일 상태가 다시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진 박 병장에게 패혈증이 발생했다. 20일 오전 4시 병원 앞 숙소에 있던 부부에게 병세가 위급하니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애를 더는 힘들게 하지 마세요.” 의사가 심폐소생술을 하려고 박 병장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자 박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54)가 의사의 손을 밀어냈다.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한 것이다. “동혁아! 동혁아!” 이 씨의 통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버지 박 씨가 깡마른 아들의 코에 한참이나 입을 맞췄다. 부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84일 동안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 “지금이라도 명예회복을”

11일 강원 홍천군 동면의 자택에서 만난 박 씨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이 씨의 머릿결도 푸석푸석했다. 부부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우리 부부가 강원도에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동혁이가 퇴원하면 요양시키려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산 땅이 여기예요. 2004년 3월에 왔어요. 컨테이너박스를 140만 원 주고 사서 들여놓고 7년을 살다가 지난해 11월에 융자를 받아 집을 지었어요.”

부부는 새로 지은 집에 박 병장의 방을 마련해 놓았다. 탁자에 해군기를 깔고 아들의 백일사진, 고등학교 졸업사진, 참수리정 사진 등을 놓았다.

아들을 잃은 부부는 전국을 헤맸다. “혹시 추억거리라도 있을까 하고 아들과 갔던 곳을 돌아다녔죠. 정동진, 남애리, 꽃지해수욕장…. 천안함도 두 번 갔고요.(박 병장은 참수리 357호 승선 전까지 천안함 의무병이었다.) 한 1년을 돌아다녔죠. 가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허망하더라고요.” 이 씨는 슬픔을 가눌 수 없을 때마다 공책에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래도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지금도 가끔은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다.

2004년 8월 박 씨가 암소 두 마리, 송아지 두 마리를 사왔다. 부부가 사는 컨테이너 위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한쪽에 축사를 만들었다. 지금은 일곱 마리를 키운다.

“소가 우리를 살렸죠. 살아있는 생명을 돌보는 것이 좋았어요. 날마다 똥 치우고, 물로 씻기고, 빗으로 털 빗기고. 처음에는 아들 묘가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갔지만 요새는 석 달에 한 번만 가요. 소 밥 줘야 하니까.”

이들 부부는 아들의 ‘명예 회복’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공무상 사망’으로 처리됐다.

“우리 동혁이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나요?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전사한 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해 주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홍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박동혁 병장은 한때 천안함에서도 의무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천안함 시절의 박 병장(오른쪽 아래).
故박동혁 병장은
동생 대학 입학 앞두고
집에 부담 안주려 입대
천안함 의무병 복무도

198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당시 목공 기술자로 쿠웨이트의 건설 현장 근로자였다. 안산 경안고 재학 때부터 남몰래 시를 쓰던 마냥 밝고 책임감이 강한 청년이었다. 2000년 원광보건대 치기공과에 입학했다. 자신의 치기공소를 차리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대학 시절 학업에 매진해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부친에게 건강보조식품을 선물했던 효자였다. 남동생이 대학생이 되기 전인 2001년 부모님의 부담을 덜기 위해 2월 해군병 456기로 군에 입대했다. 의가 좋았던 동생 박동민 씨(27)는 “형은 섬세했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고 말했다. 대학동기 이준효 씨(29)는 “쾌활한 동혁이를 모두가 좋아했다”며 “동기들이 힘들 때 많이 의지했다”고 말했다.

천안함 의무병으로 근무했으며 성실함으로 다른 장병들의 모범이 됐다. 2002년 4월부터 참수리정 357호에서 복무하다 제2연평해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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