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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正에 저항했던 3월의 함성, 50년만에 제대로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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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正에 저항했던 3월의 함성, 50년만에 제대로 기립니다

동아일보입력 2010-03-15 03:00수정 2010-03-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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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서 의거 재현…고교생-시민 2000명 참가
1960년 경찰과 대치
1960년 3·15의거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거리시위에 나선 경남 마산지역 여고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총을 메고 있는 경찰관들의 모습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제공 3·15의거기념사업회
“마산시민 여러분! 자유당 정권은 이번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우리 민주당은 선거 포기를 선언합니다.” ‘민주 성지(聖地)’ 경남 마산에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 학생의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3·15의거기념사업회가 의거 50주년 및 국가기념일 제정을 기려 13일 오후 마산시내에서 대규모 재현 행사를 처음 마련한 것. 행사에는 고교생 1750명과 시민단체 회원 등 20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동동 옛 민주당 마산시당부를 출발해 창동사거리를 거쳐 옛 남성동파출소(현 창동치안센터)를 지나 서성동 3·15의거 기념탑까지 3km를 행진했다. 백한기 기념사업회장(68)은 “의거 당시 1, 2차 시위에서 12명이 희생됐고 184명이 다쳤다”며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3·15의거가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14일에는 국립3·15민주묘지에서 대진혼굿과 추모제가 열렸다. 15일 오전 10시 마산3·15아트센터에서는 50주년 기념식이 마련된다.

○ 목숨 걸고 독재 항거

2·28 대구학생의거, 3·8 대전고 시위 이후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자유당은 정부통령 선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 시민극장에 행정, 경찰, 교육, 세관, 철도 공무원 등을 모아놓고 부정선거 지침을 시달했다.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될 선거가 시작됐다.

이에 따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성난 시민과 경찰이 충돌했다. 오후 7시 무렵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공격했다. 1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마산시청(개표장)으로 이동해 “내 표를 내놔라”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맞서던 경찰은 결국 오후 8시 10분경 시위대에 총을 쏘았다. 당시 오른쪽 대퇴부에 총상을 입은 변승기 3·15기념사업회 부회장(65)은 “김주열 열사도 우리와 같은 시위 대열에 있다 최루탄을 맞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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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16일 새벽까지 계속됐다. 당시 군중 앞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자”고 연설했던 민주당원 이양수 씨(당시 31세)는 경찰에 끌려갔다. 현재 3·15의거부상자회 회장인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해 다리가 부러졌고 개머리판에 어깨를 맞아 뼈에 금이 갔다”고 회고했다.

2010년 “정신 계승”
3·15의거 참가자 등이 14일 오전 경남 마산시 구암동 국립3·15민주묘지에서 “국가기념일 제정은 의거 50년 만의 쾌거”라고 입을 모았다. 왼쪽부터 유족 강재락 씨, 변승기 3·15의거기념사업회 부회장, 오무선 유족회장, 백한기 기념사업회장, 김종배 기념사업회 직전 회장, 이양수 부상자회장, 유족 김영실 씨. 마산=최재호 기자
○ 민주화 화신 김주열 열사

15일 실종됐던 김주열 열사(당시 17세)의 시신은 그해 4월 11일 오전 11시경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 200m 지점에서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경찰이 주열의 눈에 포탄을 박아 죽였다”는 소문에 흥분한 시민들이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6시 15분경 병원 앞길에서 2차 시위가 시작됐다. 1차 시위보다 규모가 컸다. 마산경찰서와 시청 등 관공서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결국 오후 9시 반경 경찰의 발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경찰은 김 열사 시신을 13일 검안한 데 이어 다음 날 새벽 고향인 전북 남원으로 몰래 운구했다. 남원에 도착해 입관을 마친 김 열사 시신은 곧바로 장지로 향했다. 1944년 10월 14일 태어나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고(현 용마고) 입학을 기다리던 김 열사는 독재정권의 흉탄에 그렇게 스러져 갔다. 하지만 4·18 고려대생 봉기와 4·19혁명에 불을 댕겼고 민주화의 화신으로 태어났다. 오무선 3·15의거희생자유족회장(71)은 “고귀한 열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 정착과 의거 정신 계승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마산=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 3·15의거 ::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마산시당이 ‘사전투표함’을 발견하고 선거 포기와 부정선거 무효를 선언하자 마산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사건. 의거 첫날 실종됐던 김주열 열사 시신이 4월 11일 오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돼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이제야 동생 김주열을 역사에 묻습니다”
■ 누나가 말하는 ‘열사’
“아직도 고등학생 같은데… 동아일보 통해 사망 알았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누나 김경자 씨가 14일 오후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아직도 고등학생 같은데 벌써 50년이 흘렀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앞길이 창창했던 두 살 아래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걸까. 김주열 열사 이름을 꺼내자 둘째 누나인 김경자 씨(68) 눈에 눈물이 고였다. 14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의 한 교회에서 만난 김 씨는 “3·15의거 50주년을 맞으며 유가족 모두 이제는 정말 동생을 역사에 묻는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다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김 씨는 김 열사를 “정말 착하고 성실했으며 똑똑했던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집안에서도 주열이가 대성할 것으로 보고 기대가 컸는데 날벼락 같은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집안 전체가 무너졌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김재규 씨는 아들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고 묻었다는 죄책감에 심장병을 얻어 1965년 사망했다. 어머니 권찬주 씨도 평생 ‘3·15’의 짐을 지다 1987년 작고했다.

김 씨는 “라디오도 없는 시골이라 동아일보 신문에서 처음 ‘김주열 사망’ 소식을 접했다”며 “그전에 어머니가 아들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찾지 못했고 1960년 4월 11일 전북 남원의 고향 선산에 급작스레 묻을 때는 경찰이 보지 못하게 해 가족들이 시신 확인도 제대로 못했다”고 말했다.

3·15의거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데 이어 다음 달 11일에는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가 경남 마산에서 50년 만에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늦게나마 이런 추모사업들이 제대로 이뤄져 동생이 편안히 눈을 감을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동아일보 변영욱 기자
발포 경관들, 혁명재판소서 무기징역 등 중형
■ 판결문으로 본 마산의거

3·15의거 당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던 경찰관들은 5·16군사정변 이후 제정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 경위(당시 46세)는 1960년 3·15의거 당시 부산지법 마산지원 부근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발사해 김주열 군(당시 17세)을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박 경위에게는 같은 장소에서 동료 경찰관들과 함께 카빈 소총 및 권총 실탄 200여 발을 발사해 사상자 12명(사망자 3명 포함)을 낸 혐의도 적용됐다.

박 경위는 일반 법원이 아닌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에 따라 설치된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혁명재판소는 현역 장교인 재판장과 군법무관인 법무사, 군법무관·법관·변호사가 각 1명씩인 심판관 등 5명으로 이루어진 심판부가 1, 2심 재판을 맡았고 대법원으로 상고할 수 없었다.

혁명재판소는 1961년 9월 “인명살상의 위험이 있다는 점을 알고도 그릇된 복종심과 자기 도취된 책임감에서 군중 해산에 열중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을 살해했다”며 박 경위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 경위는 “최루탄이 폭발해서 가스를 발산해 군중의 행동의 자유를 상실케 하는 효용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으며 인명살상 위험은 예견하지 못했다”며 항소했지만, 상소심판부(2심)는 3개월 뒤인 같은 해 12월 박 경위의 항소를 기각했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 동아일보 ‘최루탄 박힌 김주열 열사 사진’ 보도깵 ‘혁명’ 기폭제

1960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에 실린 김주열 열사 시신 사진. 동아일보는 당시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태극기를 덮은 김 열사 사진을 게재하며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최루탄이 관통한 ‘구조도’도 함께 실었다.
‘선거의 불법 무효 선언.’ 동아일보는 1960년 3월 15일 민주당이 ‘3·15선거는 불법, 무효’라고 선언한 것을 긴급 호외로 찍어 보도했다. 같은 날짜의 신문은 ‘일찍이 없던 공포 분위기’ ‘3인조 투표 감행?’ 등의 제목으로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낱낱이 폭로했다.

3·15의거 기념사업회가 2004년 발간한 ‘3·15의거사’ 중 ‘언론에 비친 3·15’ 부분에도 동아일보 보도 내용이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3월 16일자엔 ‘백주(白晝) 공공연한 테러’ ‘민주당 참관인 두들겨 내쫓고 번호표 안 주는 등 폭동을 야기’라는 기사와 함께 만화 ‘고바우 영감’이 눈길을 끈다. 투표소에 들어간 영감이 투표함에 용지를 넣으며 ‘그대여 양심을 지켜다오’라고 하자 참관인 2명이 ‘누구 보고 한 소리야’라며 버럭 고함을 지른다. 영감은 ‘투표함 보고 한 소리지 뭐야’라며 짐짓 둘러대는 모습이다. 당시 고려대 3학년생으로 3·15의거와 4·19혁명에 참가했던 정계환 전 경남대 외래교수(72)는 “동아일보는 야당지로서 인기가 대단했다. 정·부통령 선거와 관련한 사설도 정곡을 찌르는 명사설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자 호외는 ‘마산서 오늘 밤 중대사태’라는 제목으로 수만 군중이 전 시가를 휩쓸고 경찰서 등 관공서가 대파된 소식을 전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마산에 파견돼 2차 시위를 취재했던 박용윤 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대우(81)는 “그때는 ‘신문에 났어?’가 아니라 ‘동아에 났어?’라고 할 정도였다”며 “동아일보 보도가 1960년 민주화투쟁을 선도했다”고 소개했다.

마산=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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