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미국 지탱하는 ‘9인의 城’ 그 문을 열다

  • Array
  • 입력 2010년 3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낙태허용 - 사형제 폐지 여부 등 결정
막강한 영향력 지닌 연방대법원 해부

대법관들 판결 가르는 건 이념 차이
오바마 재선 땐 무게중심 바뀔지 관심

◇더 나인/제프리 투빈 지음·강건우 옮김/640쪽·3만8000원·라이프맵

미국 연방대법원이 2000년 12월에 내린 ‘부시 대 고어 사건’ 판결은 이 기관의 영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9명의 연방대법관은 5 대 4로 ‘플로리다 주 법원의 재검표 시한 연장 조치는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조지 W 부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확정했다.

연방대법원의 영향력은 판결로 대통령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도 극적이었지만 이후 앨 고어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승복함으로써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판결을 비난하는 편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당사자였던 고어나 국민 모두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 소속인 저자는 44개 계단과 8개의 웅장한 기둥 뒤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연방대법원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연방대법원에서 일하는 수백 명의 젊은 재판연구원과 종신직 대법관들을 인터뷰해 책으로 엮었다. 대법관 각각의 성격과 사법 철학, 다른 대법관과의 관계가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미국 사회의 미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낙태와 총기 소유, 사형제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판결은 연방대법원의 이 정문 안쪽에서 내려진다. 연방대법원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연방대법원에 44개나 되는 계단을 둠으로써 인간 세상과의 분리를 의도했지만 연방대법관 역시 정치 구조의 한 부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진 제공 라이프맵
미국 사회의 미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낙태와 총기 소유, 사형제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판결은 연방대법원의 이 정문 안쪽에서 내려진다. 연방대법원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연방대법원에 44개나 되는 계단을 둠으로써 인간 세상과의 분리를 의도했지만 연방대법관 역시 정치 구조의 한 부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진 제공 라이프맵
○ 낙태-사형제 판결 ‘사회 나침반’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곧 미국 사회의 나침반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낙태 허용 여부. “연방대법원이 다루는 사건은 낙태 사건과 낙태 외의 사건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사건’에서 “프라이버시권은 임신을 종료할지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포괄할 정도로 충분히 폭넓은 것”이라는 판결로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했다. 19년 뒤 ‘남동 펜실베이니아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사건’은 낙태 허용을 새롭게 판단할 기회였다. 보수 성향의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지지를 바탕으로 초반에는 낙태 금지 판결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대법관 데이비드 수터, 샌드라 데이 오코너, 앤서니 케네디가 조용히 연합해 ‘낙태 허용’은 유지됐다. 데이비드 수터는 보수파의 반대 없이 임명됐고, 앤서니 케네디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낙태 허용에 표를 던진 것이다.

2007년 ‘베이즈 대 리스 사건’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주사제를 이용한 사형방법을 문제 삼아 사형제 폐지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이 사건에서 진보성향의 대법관인 존 폴 스티븐스와 스티븐 브레이어는 ‘주사약 주입에 따른 사형수의 고통을 증명할 자료가 충분치 않다’며 보수주의자들이 원하는 판결을 내렸다.

○ 인준 과정서 이념성향 눈길 집중

대법관들 사이에 지적 능력이나 윤리적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들을 갈라놓은 기준은 사법철학, 즉 이념이다. 연방대법원에서 이념이 차지하는 역할 때문에 매번 대법관 인준 과정에서 후보의 성별, 종교, 인종, 사상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판결 사례들이 나타내듯 대법관들이 자신의 입지에 따라 기계적인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특히 애리조나의 전직 주 상원의원이었던 전직 여성 대법관 오코너에 대해 “백중세를 보이는 중요한 판결에서 결정적인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을 사실상 주도했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대법관들도 인간이기는 매한가지다. 저자는 인터뷰와 문헌 자료를 엮어 중요 판결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 오간 법리 논쟁, 이념 차이에 따른 분노의 표출, 대법관을 돕는 재판연구원들의 경쟁을 소개한다.

○ 버락 오바마 재선 후 이념 무게중심 관심

미국 정부의 다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연방대법원 역시 다양한 정치적 이슈를 대면하면서 숱한 실패를 경험했다. 존 마셜 전 연방대법원장(1801∼1835 재임)은 연방정부의 영속적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노예제도를 개선하는 일이나 남북전쟁을 회피하는 데 있어서는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대법관을 뽑을 때 지역 안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도 있었다.

저자는 무엇보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법관도 선거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가 인준하는 정치 구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 이후 보수로 기울어진 대법원의 저울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알 수 없다. 가까운 미래에 최대 3명 정도가 교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와 로버츠는 기업에 선거광고를 허용한 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