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北 진주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 아닌 약탈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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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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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 만취 행패… 무전취식에 부녀자 겁탈까지

■ 소련군이 쓴 보고서 발견
“조선인 노예로 더 있게하자
봉기땐 절반 교수형 시킬것”

처벌 거의 없어 만행 지속
“일벌백계” 건의도 묵살당해

이른바 ‘해방군’을 자처하며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북한에서 드러낸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됐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이 13쪽짜리 보고서는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당시 이 보고서는 연해주 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칼라시니코프 소련군 중장에게 보고됐고, 이듬해 1월 11일엔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위원인 스티코프 상장에게도 전달됐다. 러시아어 필사본인 이 문서는 미국의 외교안보전문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뒤 영어로 번역했다.

○ 소련 군인이 직접 쓴 조선 약탈보고서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페드로프 중좌는 당시 ‘붉은 군대’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신의주 내 70곳 이상의 여관과 공공건물에서는 밤마다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적시됐다. 1945년 12월 6일 공병장교 막시모프는 휘하 병사 7명과 함께 한 여관에 투숙한 뒤 여자를 부르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뒤 다음 날 아침에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 더 기가 막힌 일은 막시모프 일행이 5일 후인 11일 또 이 여관에 들러 숙박비라며 돈을 냈는데 당시 북한에서 전혀 통용되지 않아 휴지조각으로 취급되는 만주 돈이었다는 것이다.

또 한 조선인이 술로 곤죽이 된 소련군 중위를 끌고 갔던 사건의 기록도 있다. 이 조선인은 “내 아내가 소련군에게 겁탈당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만행에 대한 처벌이 거의 없었다는 점. 소련군 스쿠트스키 중령이 사단 헌병대에 일벌백계(一罰百戒)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해방자’를 자임했지만…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한 약탈과 관련해 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배고픈 정복자의 본성 드러내

보고서는 “군내 질서를 잡고 25군단 내 정치적 도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며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뒤 이 사실을 널리 전군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소련군 역시 미군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진주했고 진주 후에도 현지 사정에 무관심했다”며 “이는 북한 진주 초기 소련군의 비행과 풍기문란이 심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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