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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10·끝>철도의 길 근대기 영욕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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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10·끝>철도의 길 근대기 영욕의 흔적

동아일보입력 2010-03-03 03:00수정 2010-03-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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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밟고 온 日제국주의… 수탈의 땅에 근대문물 ‘굉음’
중국 다롄 시에 있는 만철 본사 건물. 현재 다롄 시 철도국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1907년 설립된 만철은 일본의 대륙 진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다롄=구자룡 특파원
《‘경인 쳘도 회샤에셔 어졋긔 개업 례식을 거행하난듸 인쳔셔 화륜거가 떠나 삼개 건너 영등포로 와셔 경셩에 내외국 빈객들을 슈례에 영접 하여 안치고 오젼 9시에 떠나 인쳔으로 향하는듸 화륜거 구난 쇼릐는 우뢰 갓하야 텬디가 진동하고 긔관거(機關車)에 굴독 연긔는 반공에 쇼사 오르더라…’ (독립신문 9월 19일자)

1899년 9월 18일,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개통식이 열렸다. 현재의 서울 노량진역에서 인천역 인근까지 약 33.2km 구간이었다. 이 구간을 기차로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지금과 비교하면 느린 속도지만 서울과 인천을 오가기 위해 반나절을 걸어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지가 진동한다’고 느껴질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 수탈 교두보
불평등 조약 맺어 철도 부설
쌀 수송 14배까지 늘어

근대문물의 상징
“반나절 거리가 1시간40분에”
지식인들 문명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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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업화에 영향
철도따라 물류체계 형성
21세기 ‘국토 대동맥’으로

○ “증기와 전기기관 소리가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

인천 중구 도원역에 있는 ‘한국철도최초기공지’ 표석. 인천=이새샘 기자
도원역 인근, 예전에는 우각현(쇠뿔고개)이라 불렸던 곳에는 1897년 3월 경인선 기공식을 기념하는 ‘한국철도최초기공지’ 표석이 서 있다. 도원역 인근에서 옛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 역시 예전의 증기기관차가 아니라 전기를 이용하는 지하철이다.

그러나 역에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배다리거리가 나온다. 한국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영화초등학교가 이곳에 남아 있다. 미국 존스 선교사 부부가 1892년 4월에 세운 매일학교의 후신 격인 학교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이광수 ‘무정’)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다. 책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은 ‘무정’을 두고 “철도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다. …(작품에서)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이라고 분석했다. 이 책의 저자인 박천홍 아단문고 학예실장은 “이광수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철도는 근대 문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인식됐다”며 “당시 문학작품에서는 ‘철도’를 보고 느꼈던 놀람과 경이, 전통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 외부에 대한 경계 등 복합적인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불평등 조약으로 시작한 철도 부설

조선의 근대화는 외세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왜곡된 근대화였다. 1898년 9월엔 일본이 조선 정부와 경부철도 부설권에 관한 조약 ‘경부철도합동’을 체결했다.

‘경부철도합동’은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철도 용지 무상 제공 △철도 용품, 영업이익에 과세 금지 △완공 후 15년간 경부철도 영업권은 일본이 소유 등 한국에 불리한 조항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은 철도 부설 용지를 헐값에 매입한 것은 물론 전답의 곡물을 마음대로 베어내는 등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횡포를 부렸다. 철도 건설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20∼30전. 일본인 노동자는 같은 직무라 하더라도 60∼100전으로 3배가 넘는 임금을 받았다.

철도 부설 과정에서 수탈을 견디지 못한 지역 주민들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04년 9월 15일 경기 시흥군 일대 주민 1만여 명이 당시 군수와 그 아들을 살해한 ‘시흥민란’이 대표적이다. 철도가 개통된 뒤에는 철로나 철도역이 독립군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갔고요/어랑어랑 어허야/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민요 ‘신고산 타령’)

조선철도는 쌀, 목재, 석탄 등 농수산품부터 지하자원까지 각종 국내 자원을 국외로 반출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저서 ‘일본침략과 한국철도’에 따르면 1911년 국유철도 전체의 쌀 발송량은 7만6757t. 1938년에는 약 14배인 108만7383t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비율은 전체 14%(1915∼1919년)에서 전체 46%(1930∼1934년)로 늘었다.

○ 철로 너비 1.435m의 비밀

당시 경부선 궤간(철길 궤도의 두 쇠줄 사이의 너비)은 표준궤인 1.435m였다. 당시 일본철도의 궤간은 약 1.066m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경비를 절약하고 조선의 물류 상황에 맞춰 일본과 같거나 더 좁은 궤간을 채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표준궤를 채택했다. 조선철도를 통해 중국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국철도의 궤간이 표준궤였다. 정 이사장(철도사)은 “일본의 대륙진출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철도의 궤간”이라며 “궤간은 열차의 폭을 결정하기 때문에 철도와 철도가 직접 연결되기 위해서는 궤간이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일본의 의도는 경의선 건설에서도 드러난다. 경의선 착공 시기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중에도 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해 1905년 4월 대부분의 구간을 완공한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 철도 건설의 실질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경의선 완공으로 부산에서 서울, 다시 신의주로 이어진 철도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단둥과 연결됐다. 일본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서 연락선을 타면 철도로 부산에서 만주까지 단숨에 다다를 수 있었다.

○ 철도가 남긴 근대의 흔적

2월 23일 오후 중국 랴오닝(遼寧) 성 다롄(大連) 시 중산(中山)공원에 있는 다롄빈관(大連賓館). 호텔 앞에서 일본인 관광객 10여 명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 르네상스식 건물의 1914년 축조 당시 이름은 야마토 호텔이다. 다롄 시에 본사가 있었던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설립 운영했던 호텔이다.

구시가지 중심가인 루쉰(魯迅)로의 만철 본사 건물은 옛 건물 그대로 다롄 시 철도국 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루신로에는 만철병원(현 다롄대 부속 중산의원)과 만철 직원들의 위락시설이었던 만철구락부(현 철로문화궁)가 함께 있다.

동행한 유병호 다롄대 한국학연구원장은 “중국 학계에서는 중국이 스스로 필요한 만큼 철로를 부설할 능력이 있었지만 일본의 침략으로 자체적인 개발이 진행되지 못했다고 본다”며 “당시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선양∼지린 구간 철로를 부설한 일이 단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다롄에는 여전히 만철의 영향이 깊숙이 남아 있었다. 다롄빈관은 관광 성수기면 62개 객실이 꽉 찬다. 대부분이 일본인 관광객이다. 현재 다롄 시 외국인 투자가 중 70% 이상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다. 만철이 세운 서양식 건물은 대부분 옛 모습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한국도 일제가 부설한 철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등 산업화 과정의 물류체계는 일제가 건설한 철도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정 이사장은 “일제는 경부선의 경우 주로 산업발전과 군사이동을 위해, 호남선 등 다른 지선은 수탈을 위해 사용했는데 이 같은 산업구조가 광복 이후 산업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때 철도는 자동차 운수의 발달로 산업과 물류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20세기 초 근대의 영욕을 실어 날랐던 철도는 오늘날 경의선 일부 구간 재개통, 고속철도 개통 등으로 새롭게 주목받으며 ‘21세기의 길’로 떠오르고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다롄=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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