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강제폐방 29년…DNA는 살아있다]<하>출연자들이 말하는 ‘나의 사랑, 나의 D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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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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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정론 - 실험정신, 다른 방송이 못따라올 정도”
이철승 “정계야화 출연뒤 새벽 화염병 공격받아”
DJ 윤형주 “청취자 엽서 하루 400통씩 쏟아져”
박정자 사미자 전원주 김무생 성우 1기로 활약

청취자 사로잡았던 그 시절 그 방송동아방송은 새롭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대중에게 친숙한 인기인들을 방송 진행자로 등장시켜 청취자들과의 접점을 넓혀갔다. 왼쪽부터 ‘그 시절 그 노래’를 진행하는 최불암 씨, ‘허참과 이 밤을’의 허참 씨(가운데), ‘김희갑 쇼’의 고 김희갑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청취자 사로잡았던 그 시절 그 방송
동아방송은 새롭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대중에게 친숙한 인기인들을 방송 진행자로 등장시켜 청취자들과의 접점을 넓혀갔다. 왼쪽부터 ‘그 시절 그 노래’를 진행하는 최불암 씨, ‘허참과 이 밤을’의 허참 씨(가운데), ‘김희갑 쇼’의 고 김희갑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방송은 개국 1년 만인 1964년 당시 공보부 조사에서 33.5%의 청취율로 전국 방송인 KBS를 제외하고 1위에 오를 정도로 청취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출연자들은 “동아방송은 권력 비판, 정론과 더불어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에서 다른 방송이 못 따라올 정도로 앞서갔다”고 회고했다.》7선 국회의원 출신인 이철승 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87)은 1965년 4∼6월 대담프로인 ‘정계야화’에서 광복과 6·25전쟁, 5·16군사정변과 관련된 회고담과 함께 정계 뒷얘기를 전했다. 이 회장은 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방송을 하면서 굉장히 애를 먹었다. 광복 후 신탁통치반대운동 등 학생 운동이 건국에 도움을 줬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는데 당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운동을 비롯해 학생 운동이 뜨거운 시기였다”며 “어느 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찾아와 ‘학생들을 자극하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방송 기간이던 어느 날 새벽 누군가가 대문 앞에 화염병 2병을 던져 불이 났다. 다행히 새벽까지 공부하던 옆집 고등학생들이 이를 보고 알려줘 불을 끈 일도 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대담프로인 ‘노변야화’는 1969년 10월∼1970년 1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한국 주먹계를 평정했던 김두한 전 국회의원을 초대했다. 김 전 의원의 딸인 김을동 친박연대 의원은 “아버지가 싸움 설명을 할 때 ‘내가 부하들하고 어디를 갔는데, 쉬∼익 하고 주먹이 날아와 피한 뒤 내가 파∼악 쳤다’ 등 음향효과까지 입으로 내시며 실감나게 현장을 설명해 인기였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요즘 말하는 이른바 ‘방송 용어’라는 것을 모르셨어요. ‘내가 방문을 열었는데 말야, 꼬붕(부하)이 탁 들어와서’라는 식으로 주먹 세계 용어를 그대로 쓰셔서 나중에 담당 PD가 편집하느라 고생했다고 하더군요(웃음).” 김을동 의원은 1967년 3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동아방송 성우 3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동아방송 예능 프로에서 활약했던 출연자들은 어느덧 노년이 됐다. 가수 윤형주 씨(62)는 1971∼72년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에서 디스크자키(DJ)를 맡았다.

“스튜디오에 기타를 갖다 놓고 매일 밤 라이브로 노래를 불렀죠. 이용복, 이연실, ‘라나에로스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당시 ‘0시의 다이얼’에 나왔다는 건 젊은이들의 세계에 소개가 되는 거였어요.” 청취자들의 엽서가 하루에 평균 400통씩 쏟아졌고 매일 20통 정도 뽑혀 방송에 나갔다.

MC 허참 씨(60)는 1977∼79년 ‘허참과 이밤을’을 진행했다. 그는 “당시 동아방송은 다른 방송에 비해 자유로운 분위기면서도 방송 자체가 훈련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저녁시간대라 스튜디오에서 자장면을 시켜먹으면서 방송한 적도 있었는걸요, 허허. 방송도 진행자에게 100% 맡겨줬고요. 하지만 방송 전에 장인식 PD는 작가가 있는데도 진행자에게 큐시트 쓰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동아방송에서 진행의 기본기를 다졌습니다.”

게스트로 초대된 코미디언 김병조, 강석, 이홍렬 씨는 이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민요가수 김세레나 씨(62)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4년 12월 ‘동아방송 가요백일장 연말결선대회’에서 장원을 했다. 김 씨는 동아방송을 통해 가수로 데뷔한 첫 사례다.

“1등 상금 3만 원을 받아서 한턱 내고 동생들 필요한 것 사주고… 안 해본 게 없었답니다. 부상은 비누 한 꾸러미였고요. 어린 나이에 가수 활동을 시작했는데 동아방송 가요백일장 출신이라는 점이 큰 힘이 됐습니다.”

연극배우 박정자 씨(67)는 배우 사미자 전원주 씨, 고 김무생 씨 등과 함께 동아방송 성우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박 씨는 “150 대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당시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최고였다”고 회고했다.

동아방송 성우 1기인 박웅 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69)은 “지금 동아미디어센터가 있는 자리에 2층짜리 별관이 있었고 1층에 성우실이 있었다”면서 “대본이 한 부 내려오면 글씨를 잘 쓰는 성우 몇몇이 손 글씨로 복사본을 여럿 만들어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964년 ‘앵무새 사건’ 김영효 PD
“군사정권 탄압에도 비판 멈추지 않았죠”
“같이 가야겠소. 방송원고도 챙기시오.” 1964년 동아방송 라디오칼럼 ‘앵무새’의 PD 김영효 씨는 검은 지프차를 타고 서울 남산 근처 치안국 안가로 끌려갔다. 최창봉 방송부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윤하 편성과장 등 동료 5명도 함께 연행됐다.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동아방송 수난사의 첫머리에 기록된 ‘앵무새사건’이다.

11월 27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자택에서 김영효 씨(77·사진)를 만났다. 그는 첫딸의 돌 직후였던 32세 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오후 9시 55분부터 5분간 방송한 ‘앵무새’는 학생들의 시위 소식 등을 보도하면서 군사정권을 시원하게 비판해 청취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는 “서슬 퍼렇던 시절, ‘앵무새’는 보고 들은 대로 전하겠다는 뜻을 담은 제목이었다”면서 “주제와 내용, 표현의 강도가 거침없어 사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동아방송의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은 강도 높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앵무새’가 제재 대상이었지만 실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전반적인 논조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죠.”

이들 6명은 계엄사령부에 의해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별법 등의 위반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구속 송치됐다. ‘앵무새’에서 ‘도대체 현 정부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때 묻은 짓을 했기에…’, ‘살인을 예사로 아는 깡패와 도둑이 연중무휴 우글거리고…’ 같은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64일간 붙잡혀 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같은 고초에도 동아방송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풀려난 뒤에 김 씨는 동아방송의 ‘그 시절 그 노래’ 프로그램 PD를 하면서 배경음악 대신 시위 함성을 내보내 당국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앵무새사건 관련자 6명은 5년 6개월 만인 1969년 12월 서울형사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선고문은 ‘좀 지나친 보도나 논평을 한 것은 인정되지만 내란죄라는 적극적인 범죄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사관에게 물었습니다. ‘왜 하필 동아입니까?’ 그는 ‘다른 신문사나 방송국은 뭐라고 하든 상관없지만 동아는 절대 안 돼’라고 답하더군요. 국민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이었죠.”

부인 이금선 씨(76)가 “그때 온 민중의 기(氣)가 동아에 한껏 모여 있었다”고 거들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1964년 국내 방송DJ 1호 최동욱 씨

“광화문일대 전화불통… 공개방송땐 교통마비”
“젊음의 낭만과 푸른 꿈을 노래 속에 싣고 기쁨을 찾는 멜로디와 리듬의 퍼레이드! 미국의 최신 유행 음악을 소개하는 탑-툰-쇼!”

1964년 9월, 동아방송의 전파를 타고 생동감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트러짐 없는 아나운서의 억양과 달리 청취자를 초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한 말투였다. 마이크 앞에 앉은 이는 곡명을 소개하고 해석을 곁들인 뒤 기기를 만져 음악을 틀었다. 한국 방송 최초의 디스크자키(DJ)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1월 27일 만난 국내 1호 DJ 최동욱 씨(73·사진)는 “PD, 아나운서, 엔지니어를 도맡는 DJ의 탄생은 당시 동아방송이 진취적인 방송 선각자들로 이뤄졌다는 증거”라고 회고했다. 그는 “동아방송은 개국할 때부터 5개의 방송 스튜디오 가운데 2곳을 국내 최초로 믹싱 기기와 턴테이블, 녹음기, 마이크가 설치된 DJ 전용시설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 씨가 진행한 동아방송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한국 방송의 신기원을 이뤘다. ‘3시의 다이얼’은 1966년부터 3년 동안 청취율 1위를 차지하며 라디오 방송에서 ‘불모의 시간대’였던 오후 3시를 ‘황금의 시간대’로 바꿔놓았다. 그는 “엽서와 전화를 받아 진행하는 리퀘스트 포맷이 청취 의욕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1970년 10월 전파를 탄 ‘0시의 다이얼’은 국내 최초로 심야 생방송을 시도했다. 깊은 밤 청취자와의 교감은 ‘별이 빛나는 밤에’(MBC), ‘밤을 잊은 그대에게’(TBC) 등 유사 프로그램을 이끌어 내며 심야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프로그램의 높은 인기 덕에 생긴 일화도 많다. 오후 3시면 광화문에 전화가 몰려 다른 곳까지 불통되는 바람에 전화국에서 방송국에 전화 사용 자제를 요청하는 일이 잦았다. 1966년 ‘보이는 라디오’의 원조인 미도파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특집방송 ‘크리스마스이브의 다이얼’은 생방송 도중 끝내야 했다. 최 씨는 “방송을 지켜보려는 행인들이 차도까지 몰려 명동의 교통이 마비되자 남대문경찰서장이 찾아와 간곡히 요청했다”고 전했다.

그는 2005년부터 인터넷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서울코리아’(www.radioseoulkorea.com)를 통해 매일 오후 8시부터 밤 12시까지 생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동아방송과 최동욱을 기억하는 이들에 대한 보답이에요. 요즘 라디오에서는 연예인들의 잡담만 이어질 뿐 전문 DJ의 말을 듣기 어려운 게 아쉽더군요.”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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