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축을 말한다]<3>민현식의 서울 강남구 로얄&컴퍼니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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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1일 03시 00분


이훈구 기자
이훈구 기자
땅을 거스르지 않고 ‘비움’을 만든다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듯
아름다움은 건물 형태보다
자연과의 어울림에서 나와
건물의 평면은 높낮이가 일정해야 할까.

서울 강남구 논현동 로얄&컴퍼니 사옥 1층 평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10일 오전 찾아간 건물의 서쪽 출입통로는 계단을 촘촘히 놓은 ‘언덕길’이었다. 설계자인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63)는 가파른 오르막 지형을 평평하게 고르지 않고 건물 안에 그대로 끌어들여 땅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다.

“한국 건축은 아직 20세기 모더니즘의 영향권 안에 있습니다. 경사진 땅은 당연한 듯 파내고 눌러 평평하게 만든 다음 단단한 옹벽 울타리 안에 건물을 세우죠. ‘비움을 구축(構築)’하겠다는 내 건축의 화두는 땅이 본래 가진 조건을 따르는 데서 시작합니다.”

평면의 높낮이만 땅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로얄&컴퍼니 계단을 오르내리며 만나는 벽과 바닥 모서리에는 여느 오피스빌딩에서 흔히 보는 수직의 맞물림이 드물다. 1000m² 넓이의 직사각형 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반듯이 잘라놓은 두부모 같지만 입체로 살펴본 그곳에는 4개 경계면 높이가 제각각인 땅의 굴곡이 이미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었다. 민 교수는 원래 있던 공간을 찾아내 건물 안팎의 표정으로 확장한 것이다.

5일 오후 찾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 민 교수 사무실의 공간도 로얄&컴퍼니와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작업용 책상과 맞은편의 밤샘용 야전침대 주변에는 이렇다 할 장식물이 없다. 공간의 느낌을 결정짓는 것은 커다란 창문 밖 가로수 잎을 지나 바람에 섞여 들어온 햇살의 흔들림이었다.

“공간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건물 자체의 형태보다는 바깥 환경과의 어우러짐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풍경은 시시때때로 변하죠. 자연의 흐름에 종속된 아름다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건물이 아닌 비움을 만든다’는 그의 이야기는 한국 전통 건축이 추구했던 공간의 이상(理想)에 닿는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늦깎이로 독립한 민 교수는 설계사무소 이름을 창덕궁 ‘기오헌(寄傲軒)’에서 가져왔다. 조선 헌종의 아버지였던 효명세자가 책을 읽기 위해 마련한 전각. 단청도 없이 소박한 풍모가 선비의 자존심(寄傲)을 닮은 건물이다.

“원도시건축에서 자리 잡고 잘 지내다가 느닷없이 직원 하나만 달랑 데리고 혼자 살림을 차렸죠. 젊은 시절부터 모더니즘에 거스르는 건축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어요. 김수근 윤승중 선생님 밑에서 철저한 모더니스트로 훈련받았습니다. 나이 들어 ‘비움’을 파고드는 건 어쩌면 그 시절에 대한 반항일지도 모르겠어요.(웃음)”

1989년 영국 런던의 건축학교 AA스쿨 연수 경험이 많은 것을 바꿨다. 특히 한 워크숍에서 건축이론가 마이클 베네딕트 씨가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을 언급하며 아시아 건축의 ‘비움’을 논하는 것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설계한 서울 강남구 로얄&컴퍼니 사옥은 지형을 공간에 틈입한 건물이다. 사각형 용지 구획에 묻혔던 땅의 조건을 되살려 내부 공간과 외벽 디자인의 뼈대로 삼았다. 사진 제공 기오헌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설계한 서울 강남구 로얄&컴퍼니 사옥은 지형을 공간에 틈입한 건물이다. 사각형 용지 구획에 묻혔던 땅의 조건을 되살려 내부 공간과 외벽 디자인의 뼈대로 삼았다. 사진 제공 기오헌
“베네딕트 씨는 일본 건축을 사례로 들었죠. 그와 다른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을 이야기했더니 흥미를 보여 대화가 재미있게 이어졌습니다. 대학시절부터 ‘듣고 배운’ 기능주의 모더니즘 건축과 우리 땅을 여행하며 ‘보고 겪은’ 전통 건축의 연결점을 찾을 수 없어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오랜 숙제를 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1998년 다시 런던을 찾았을 때 만난 플로리안 베이글 북런던대 교수의 질문이 그에게 또 한 차례 잊을 수 없는 자극을 안겼다. “마당 같은 한국 전통 건축의 요소를 왜 서구의 건축 논리로 설명하려 하는가?” 한국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벽을 쌓았던 것에 대해 민 교수는 크게 반성했다.

“런던에서 공부할 때 숙소 근처 사치 갤러리에 자주 갔어요. 오래된 창고를 개조해 만든 건물이라 눈에 띄는 장식이 없죠. 전시물이 바뀔 때마다 콘텐츠의 힘을 흡수해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합니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얻은 ‘중성적 비움의 공간’에 대한 경험을 그 건물을 통해 하나의 아이디어로 정리할 수 있었어요.”

민 교수는 중학교 때 처음 건축과 만났다. 서울 서대문구 합동 집 옆에 뚝딱뚝딱 공사가 벌어지더니 어느 날 하굣길에 “UFO를 닮은 지붕”이 환하게 불을 밝힌 것. 고(故) 김중업 씨가 설계한 프랑스 대사관의 충격은 민 교수의 머릿속에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경외감 못잖게 마음 깊이 남은 것은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 숲이 그 건물로 인해 사라진 슬픔이었다. 그는 지난해 완공한 대전대 ‘차 없는 거리’ 설계 과정에 변화를 예고하고 반응을 조사하는 1년의 유예기간을 포함시켜 사용자의 충격을 줄였다.

“모더니즘 건축의 ‘크리에이티브’는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주 요구합니다. 근사한 새 공간을 만들어 다이내믹한 삶을 구성한다는 거죠. 하지만 공간 속의 삶은 좀처럼 건축가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이미 거기 있던 땅과 삶의 조건으로부터 내가 만들 건축과 공간의 골격을 찾자…. 발상의 전환이 늦은 셈이지만 괜찮습니다. 지금도 새로 나온 책을 읽다가 오랫동안 오해했던 건축가를 새삼 다시 보고 무릎 칠 때가 많은데요.(웃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민현식 교수는…

△1970년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1980∼1992년 원도시건축 근무 △1992∼1996년 민현식건축사사무소 대표 △1996∼1997년 건축사사무소 기오헌 대표 △1997년 기오헌 고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2002∼2004년 미술원장) △1992년 김수근문화상(서울 국립국악중고교) △2003년 한국건축가협회 엄덕문상(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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