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이토 히로부미의 일본

  • 입력 2009년 7월 30일 19시 27분


100년 전 한국은 암울했다. 외교권은 이미 상실했고 통치자인 고종은 2년 전 강제 퇴위 당했다. 한국 군대는 해산됐으며 정부 관리의 임명권도 빼앗겼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합방한다는 방침은 몇 달 전 확정됐다. 저물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절망의 한숨만 가득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것은 나라를 빼앗기기 전 최후의 저항이 되고 말았다. 안 의사마저도 1910년 3월 26일 처형되어 순국했다. 치욕스러운 한일강제합방이 1910년 8월 22일 이뤄졌다. 올해는 안중근 의거 100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에는 한일강제합방 100년을 맞는다.

먼저 근대화로 아시아 패권 쥐다

한국을 강제합방하기에 앞서 일본은 1894년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압승했다. 항복과 함께 거액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압도했던 비결은 한가지였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서양 이외 지역에서 근대화를 이뤄낸 최초의 국가가 일본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외세에 개방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우리보다 더 강한 쇄국정책을 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1640년 무역을 탄원하러 온 포르투갈 사절을 사형시켰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자 서양 오랑캐를 내쫓아야 한다는 양이(攘夷)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양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한 가운데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정권 내부의 소수였다. 이들은 일왕 메이지(明治)를 옹립한 세력으로 왕의 권위를 활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서양에 유학을 보내고 사절단을 파견해 서양에 맞서는 일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다. 이들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40, 50년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근대화정책을 장기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일본도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을 일본 학계는 내놓는다.

이토 히로부미는 ‘겐로(元老)’라고 불렸던 7, 8명의 핵심그룹 가운데 최고 실력자였다. 일본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총리를 비롯해 네 번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일본인에겐 근대 일본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었다. 안 의사가 그를 저격 대상으로 택한 데는 그만한 상징성이 있었다.

올가을 안중근 의거 100주년과 내년 한일강제합방 100년을 앞두고 두 행사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학계가 고심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6월 한일강제합방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내년에는 ‘평화’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미래와 화해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그릇된 과거사 인식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도 감돌고 있다.

국민의 ‘역사에 대한 내공’ 키워야

현재의 아시아 상황은 과거와 다르다. 100년 전이 일본의 독주시대였다면 지금은 중국이 최강대국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고 한국도 경제적인 부흥을 이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깊이 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 틈새에 끼여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고 세계적으로도 질서가 새로이 재편되는 시기이다. 우리가 100년 전 근대화에 뒤져 나라를 잃었듯이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면 언제든 다시 추락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통치’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온 어느 국내 학자는 회의장을 가득 메운 일본 청중을 보고 놀랐다고 전했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각국 국민이 지닌 역사에 대한 내공에 비례할 공산이 크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100년을 맞는 시점에 일회성 분노보다는 차가운 마음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의 갈 길을 생각해야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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