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김민형]‘수학의 열매’ 누구 몫일까

  • 입력 2009년 7월 30일 03시 00분


지난달 미국 방문강연 일정 중 뉴욕에서 활동하는 어느 실내디자이너와 의외로 수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분은 갑작스럽게 공간 그 자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예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필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건축가와의 관점 차이를 강조하면서 디자이너의 생각을 설명했다. 건축에서는 벽이나 지붕, 문지방, 바닥 같은 물질적 매체가 업의 기본 관심사인 반면 디자이너에게 물체란 다양한 종류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를 봐도 디자이너의 눈은 가지와 이파리 사이에 분포돼 있는 여백에 집중한다는 얘기다. 공간이라는 개념의 독립성이 기하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필자 또한 설명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시끄러운 저녁석상에서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기하학이란 고전적으로 평면도형이나 정다면체의 특성을 공부하면서 개발됐다.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독일 수학자 리만이나 가우스 등은 기하적 구조 하나하나를 바깥세상과 독립된 공간, 또는 그 자체만의 실존적 지위를 지닌 하나의 우주로 보고 그 속에 완전히 갇혀서 사는 개체를 인지해 내부의 특성을 탐구하자는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물질적 매체가 필요 없는 형태 그 자체의 내적인 탐구, 그것이 현대 기하학자의 주업무인 것이다.

그런 기이한 착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물론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에 따라 끝없이 넓어진 인간의 기하적 시각은 일상생활의 경험적 굴레를 초월해 상상의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과학에 부여했다. 이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우주를 깊이 탐구하는 과제,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과학적 상상은 공상보다 훨씬 엄격해서 경험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다. 1차원 공간은 손으로 그릴 수 있는 단순한 곡선에 지나지 않고 2차원 공간은 공이나 자동차 타이어의 표면 같은 단순한 구조로부터 조립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20세기 초에 이미 알려졌다. 그러나 3차원 공간의 분류학은 훨씬 복잡해서 불과 몇 년 전에야 러시아의 기인(奇人) 수학자 페렐만이 이론의 주춧돌을 세웠다.

지금도 일종의 ‘3차원 공간도감’을 작성하는 일을 각계에서 동시에 진행하고 있지만 이미 일부 천체물리학자가 그 초본을 유용하게 쓰고 있다. 이들은 허블우주망원경이 고속도로 수집하는 긴밀한 정보를 정확하게 설명할 만한 3차원 공간을 발굴해 우주의 거시적 구조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 우주의 미시적 구조 또한 물리학의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양자중력장론의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공간 그 자체의 구성요소를 밝혀내는 것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양성자나 전자 같은 소립자로부터 형성되고 빛을 무지개 색깔로 갈라낼 수 있듯이 실제 공간도 원시적 입자공간을 합성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공간의 화공학을 기술할 만한 이론은 수많은 천재의 일생 과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분간 빈 공간 같은 어둠 속에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수학이론의 진가가 밝혀지는 과정은 수천 년이 걸리는 게 보통이고 핵심적인 수학은 결국 상식이 돼 버린다. 고대문명 속 몇몇 전문가의 영역이던 나눗셈 이론을 요새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300여 년 전 추상과학의 극치이던 미적분학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준이다. 먼 훗날 디자이너가 구체적인 실내공간을 만드는 작업에 정립된 양자중력장론을 적용하고, 또 현장 지시에 바쁜 가운데도 공간도감을 가방 안에 챙기고 다니며 참조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김민형 런던대 순수수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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