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유산 아닌 재산’ 인식 확산…역모기지론 가입 급증

  • 입력 2009년 7월 29일 18시 51분


최모 씨(82)는 약 두달 전 고민 끝에 전 재산인 경기 파주시 교하읍의 2억9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주택연금을 신청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인 일자리사업에 참여해 용돈을 벌어 쓸 수 있었고 네 명의 자녀가 조금씩 보태주는 생활비도 있었다. 하지만 손자들의 교육비 부담이 늘어난 데다 경기도 나빠져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기가 낯이 안 섰다. 나이 80을 넘기면서 일감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몇몇 친구들은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집은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최씨를 말렸지만 그는 "집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부탁하기보다는 평생 모은 내 재산으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최씨는 매달 주택연금으로 83만 원을 받게 됐다. 그는 "소득 없이 집 한 채만 갖고 있는 노인들은 사실 빈털터리나 마찬가지"라며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니 형편이 어려운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돼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도입 초기엔 부모-자녀간 갈등 빚기도

역모기지론인 주택연금 가입자가 늘고 있다. 60세 이상 노인들이 주택을 담보로 매달 일정액의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은 2007년 도입됐지만 처음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집을 담보로 생활비를 지급받는 특성이 '집은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입 초기 상담 창구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주택금융공사 김형목 차장은 "노부부가 주택연금 계약을 하면 며칠 뒤 자녀들이 찾아와 '내 집을 왜 부모님이 마음대로 처분하느냐'며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가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올해 초까지는 월 평균 가입 건수가 50~60건에 불과했지만 3월 이후 가입자가 급증하기 시작해 4개월 연속 100건 이상씩 접수됐다. 매달 1000억 원에도 못 미치던 보증금액도 4월부터 이전의 두 배 수준인 2000억 원 대로 증가했다. 김 차장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여전히 강한 지방보다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가입자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집은 '유산'이 아니라 '재산'

외면 받던 역모기지론이 뒤늦게 관심을 끄는 것은 경기침체와 노인들의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다. 자녀들이 직장을 잃거나 소득이 줄면서 생활비를 의지할 데가 없게 되자 유일한 재산인 집을 담보로 한 주택연금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 생활비 때문에 집을 팔아버리면 목돈이 생기는 대신 당장 살 곳이 없어지지만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익숙한 집에서 계속 살 수 있는데다 매달 일정한 연금을 받을 수 있어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다. 주택금융공사 강계중 상담사는 "서울 강북 지역에 1억~2억 원대 주택을 소유한 노인들이 최근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자녀들과 함께 상담하러 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집은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이 아니라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라는 인식 변화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사는 공철규 씨(70)는 6월말 주택금융을 신청해 매달 150만 원의 연금을 받게 됐다. 공 씨는 "자녀들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평생 동안 마련한 집으로 노후에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 1년 동안 자녀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최은영 교수는 "지금까지는 '집은 상속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런 개념도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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