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실형선고 받고도 재판장에 감사한 이유

  • 입력 2009년 7월 29일 02시 59분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며 끝까지 다퉜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실형을 선고하게 돼 안타깝습니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합니다.”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성낙송)는 지난달 19일 사업을 명목으로 지인들로부터 수억 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모 씨(45)에게 이같이 판결했다. 유무죄를 다투던 피고인들은 항소심에서 실형을 받으면 재판부에 인사는커녕 종종 독설을 내뿜고 법정을 빠져나가곤 한다. 하지만 이 씨는 달랐다. 재판부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감사합니다”란 말도 잊지 않았다.

이 씨는 최근 재판장 앞으로 2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재판에서 보여주신 부드러운 미소와 음성을 가슴 깊이 간직합니다. 선고 때 당부하신 대로 교도소에서 동료 재소자를 교화하면서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재판부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얘기를 들어주고 증거 조사도 충실히 해줘 비록 실형을 받았지만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4월 특수강도와 절도 혐의 등으로 같은 재판부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김모 씨(43·여)도 재판장이 선고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한 김 씨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우울증에 걸려 상습적으로 절도를 하다 붙잡혔다. 재판장은 단순한 절도 사건임에도 선고에 30분 이상을 할애하며 친딸을 대하듯 김 씨를 타일렀다. 유무죄가 갈리는 긴장된 시간에 재판장의 따뜻한 격려와 당부가 이어지자 김 씨의 아버지도 눈물을 훔쳤다. 김 씨 부녀는 선고 후 재판부를 향해 여러 번 허리를 숙였고, 상고도 포기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주변에는 판결에 불만을 표시하며 법관들을 욕하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다. ‘고압적인 법관’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당사자’ 사이에서 연일 날 선 공방이 오가는 법조타운에는 승복의 미덕은 고사하고 법의 권위마저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판부로 날아온 감사 편지는 재판이 승패와 관계없이 사람의 한을 풀어주고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람을 섬기는 게 나의 소명”이라는 성낙송 부장판사는 첫 재판 때마다 피고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저는 법대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를 버리고 피고인의 눈높이에 맞추겠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경청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부디 피고인의 진심과 재판부의 노력이 합해져 선(善)을 이루는 재판이 되길 바랍니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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