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너무 다른 ‘한국과 일본의 인권’

  • 입력 2009년 7월 27일 02시 57분


일본의 검찰과 법원은 요즘 먼지 쌓인 과거의 수사기록과 판결문을 다시 끄집어내 꼼꼼히 되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1991년 이후 DNA 감정결과를 유력 증거로 채택해 범인을 구속하고 판결한 수많은 사건이 그 대상이다.

검찰과 법원이 이처럼 과거에 매달리게 된 것은 두 달 전 살인죄로 17년간 복역해온 어느 무기수의 무죄가 밝혀진 데서 비롯됐다. 1990년 발생한 4세 여자 어린이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이듬해 체포된 스가야 도시카즈(菅家利和·62) 씨는 피해자의 옷에 묻은 체액이 자신의 것이라는 DNA 검사결과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법원은 1993년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일본에서 DNA 검사결과를 유력한 증거로 인정한 첫 판결로 화제가 됐고 이후 DNA 검사는 과학수사 기법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변호인단의 끈질긴 노력으로 최근 DNA 재검사가 실시돼 그 당시의 체액이 스가야 씨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DNA 검사 정확도를 높인 과학기술의 진보 덕분이었다. 검찰은 법원의 재심 판결에 앞서 신속하게 그를 석방했으나, 구속 당시 44세였던 스가야 씨는 이미 환갑을 넘긴 뒤였다.

모든 언론은 이 ‘결백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신문은 1면 머리기사를 비롯해 몇 개 지면에 걸쳐 사건발생과 수사, 재판과정을 되짚었고 선량한 시민의 빼앗긴 인생 17년을 집중 조명했다. 방송은 그의 석방 장면과 기자회견을 생중계했다. 그는 “억울한 나의 인생을 돌려 달라. 수사관과 국가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여론은 들끓었고 결국 경찰간부가 그의 면전에서 “긴 세월 힘들게 해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검찰과 경찰은 사죄성명을 발표했고, 만에 하나 스가야 씨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스가야 씨 수사과정을 정밀하게 되짚는 한편 다른 사건수사에서 활용했던 수많은 DNA 증거를 폐기하지 말도록 전국 지검에 지시했다. 정치권과 당국은 스가야 씨가 DNA 증거와 수사관의 위압 때문에 한때 범행을 허위 자백한 점을 중시해 앞으로는 수사기관의 조사과정을 전부 녹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잘못은 누구든 저지를 수 있지만,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미래의 약으로 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비슷한 일이 한국에도 있었다. 1972년 춘천의 초등학교 여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간 옥살이를 하다 가석방된 정원섭 씨(75)는 올해 초 재심을 통해 36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증언과 조서가 고문과 협박에 의해 작성됐고 유죄 증거가 없다는 게 법원의 무죄판결 이유였다.

여아 살인사건과 무고한 사람 구속에 이은 강압수사와 무기징역 선고,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 최후의 결백 판명까지 판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닮은꼴은 여기까지다. 한국에서 정 씨의 억울한 인생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도 못했고, 검찰이나 법원이 재발방지 대책에 나섰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1997년 8월과 9월, 한 달 시차를 두고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사고의 취재 기억을 떠올린다. 8월 대한항공기 괌 추락과 9월 베트남 항공기의 캄보디아 추락으로 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은 사고의 처리과정과 시신수습, 보상 등을 지켜보면서 같은 생명이지만 목숨 값이 나라에 따라 다른 현실을 절실히 느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과 일본의 인생 값의 차이를 절감한다. 선량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인생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그 나라의 수준을 말해준다.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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