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4>산티아고 가는 길

  • 입력 2009년 7월 24일 03시 00분


《“고요한 길 위에서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800km의 여정. 때론 지겹고 정형화된, 예측 가능한 하루하루에 단조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뙤약볕에 몸이 축축 늘어지고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사서 고생’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서 한 그 고생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여행은 마음이다. 어떤 마음으로 길을, 풍경을, 도시를, 사람을 품었는가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것이 보인다. 볼 것이 없으면 나를 바라보게 된다.”》

800km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축복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산티아고 길’. 예수의 제자 야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다는 이 길은 세계 각국에서 순례자를 빨아들인다. 국내에도 더는 낯설지 않은 이 길에 도전한 사람은 부부와 시어머니. 부부끼리면 몰라도 시어머니와 함께했다니, 인적 구성이 독특하다. 더군다나 아내는 잡지사 취재기자, 남편은 사진기자 출신. 아내는 적고 남편은 찍어 글과 사진이 모두 풍성한 책을 남겼다.

부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합심으로 여행 관련 책을 몇 권 냈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녔지만 뭔가 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전화, 인터넷, 자동차의 방해를 받지 않는, 오직 자연과 두 다리로 마주하는 여정이 부부를 자석처럼 당겼다. 부부는 2007년 9월 10일부터 그해 10월 10일까지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30km 남짓을 걸으며 일기를 쓰듯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첫날 길에서 만난 사람은 열예닐곱으로 보이는 소년과 중년의 아버지. 불량청소년인 아들은 수행 프로그램을 이수 중이었다.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아들의 배낭까지 지고 있었다. 아들은 걷다가 길에 벌렁 드러눕기도 했다. 달래던 아버지는 급기야 소리까지 질렀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끝까지 달래서 묵묵히 걸었다. 부부는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아버지란 숙명의 짐을 느꼈다”고 적고 있다.

닷새째 되던 날에는 샹송을 멋지게 부르는 노인을 만났다. 레스토랑에 모인 여행자들이 흥을 돋우자 노인은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옆에서는 자연스레 기타가 등장했다. 식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깨동무한 채 노래를 불렀다. 국적이 따로 없었다. ‘이곳이 아니면 가능할까?’ 부부는 생각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볕이 따가운 날, 지평선이 보이는 끝없는 평지 길을 걸을 때면 살갗에 닿는 햇볕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반바지 밑의 종아리가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배낭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짊어지고 가야 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내 인생길은 내가 책임지는 것과 똑같다”고 부부는 느꼈다.

시어머니와 나란히 걸으며 며느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겪었던 고초를 들으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흉을 보며 더 가까워졌다. 밤낮으로 함께 걸으며 고부 사이는 모녀 사이로 진화했다.

목적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해 부부는 길 위의 여정 자체가 더없이 소중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만났던 여러 국적의 사람들, 황량한 들판, 전원 풍경, 스페인의 시골장터 등이 모두 축복이었다.

이 책은 산티아고 길의 철학적인 해석이기도 하지만 두 발로 한 달간 누빈 현장 보고서이기도 하다. 책 뒷부분에는 걷기 좋은 시기, 여행 비용, 준비물 등 친절한 안내가 나온다. 파리에서 출발지까지 기차 타는 방법, 알베르게(순례자들의 저렴한 숙소)의 식사메뉴 고르는 방법 등 저자들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어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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