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하진]여행의 발견

  • 입력 2009년 7월 23일 03시 16분


7박 8일간의 중국 여행을 공짜로 다녀왔다. 세 번째 개최된 한중작가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덕분이었다. 중국 서부 칭하이(靑海) 성, 성도인 시닝(西寧)이라는 도시를 이전에 나는 알지 못했으며 대회에 참석한 아라이(阿來), 메이줘(梅卓), 옌리(嚴力), 지디마자(吉狄馬加), 마딩, 마페이 등등의 소수민족 출신 작가 또한 들은 적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9일 오전 시닝의 호텔 회의실에서 지디마자의 환영사로 개막된 작가회의는 시작부터 내 예상을 뒤엎는 일의 연속이었다. 일단 참가 인원이 정말 많았다. 이 동네 사람은 모조리 언론계에 종사하나 싶게끔 엄청난 취재기자가 몰려들었으며 안내 책자에 소개되지 않은 작가도 총출동한 듯, 넓은 회의실은 그야말로 온통 사람으로 대성황을 이뤘다. 도무지 시인처럼 보이지 않는, 시골 복덕방 아저씨처럼 넉넉한 몸매, 실눈을 한 지디마자의 기조 발제문, ‘중국 서부문학과 오늘의 세계’라는 제목의 글의 정연한 논리와 단정한 문장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그 역시 시작에 불과했다.

김치수 선생의 인사말에 귀를 쫑긋하는 참에 어느 방향에선가 강한 향이 풍겨왔다. 이런 자리에서 날 법한 냄새가 아닌데 싶어 눈을 돌리는 순간 나는 상당히 특이한 정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앞자리의 여성 시인 두 사람이 서로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있었다. 책자 뒤에 매니큐어 병을 세워두고 정성껏 손톱을 칠하고는 신이 나서 서로의 손을 좍 펴 보이고 후후 불어주고…. 선생님의 눈을 피해 장난치는 여학생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눈을 돌리다 한 여성과 딱 시선이 마주치자 괜스레 민망해진 나와 달리 그이는 나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는 거였다. 그의 앞에 놓인 명패에 적힌 이름, 그건 분명히 루쉰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는 저명한 시인의 그것이었다.

자유분방한 中작가들에 놀라

오후, 소설 분과와 시 분과로 나누어 발표와 낭독이 이어지면서 비슷한 일은 계속되었다. 시작할 시간이 임박했지만 중국 측 발표자의 자리는 드문드문 비어 있었으며 출발과 도착 여부를 묻는 휴대전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동안 통화를 한 그 사람은 올지, 혹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는,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답을 내놓았다. 간신히 순서를 조절하고 낭독에 들어간 시간, 중국 작가들의 다양한 자세는 실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꾸벅꾸벅 졸거나 대놓고 하품을 하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매너모드 아닌 휴대전화 소리를 끝없이 들려주거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한국 측 작가들이 겸연쩍어지는 건 당연했다. 이 사람들은 이런 회의의 경험이 없구나, 기본적인 매너가 없구나, 작가협회 회원이 되면 절로 평생 작가로 대접받는다 하니 그저 회원이 된 데 자족하는 이들이구나, 씁쓸한 심정으로 맞은 질의와 토론의 시간, 휴대전화 벨소리로 최신 유행곡을 차례로 들려주던 작가들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느슨하던 공기가 촘촘해지고 회의장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그들은 한국작가가 하나를 질문하면 열 개를 답했고 또 그만큼의 질문을 쏟아냈다. 통역이 있어 그러하기도 했지만 어느 질문이나 답변 모두 거의 10분에 걸쳐 이어지는 장대한 것이었으며 내용 또한 깊이가 있었다. 아, 내 생각이 짧았구나, 다만 태도의 문제였구나. 변화에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지디마자 시인이 말한 바, 중국 서부문학의 독자적인 무게, 깊이, 자유분방함, 질박함, 그리고 상징적 의미로 충만한 특징과 품격을 충분히 경험할 일이 회의 중에, 그리고 회의 이후의 만찬 시간에 간단없이 이어졌다. 그건 마치 산을 넘고 또 넘어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길을 달리고 또 달려 찾아간 칭하이 호수의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광대함과 닮아 있었다.

질박한 ‘이웃의 정’ 느낀 1주일

일정을 마친 마지막 날, 느긋한 기분으로 한담을 나누던 중 한 작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그이가 “뭐야. 제부가 보낸 거잖아”라고 했다. 여행 중의 처형에게 문자를 보내는 제부라니, 대단히 자상하다 했더니 웬걸, 얼른 돌아와서 아이들 목욕시키라는 거라나. 나는 새로운 인물을 보는 듯, 놀라움을 감추고 그이를 바라보았다. 손끝에 물 안 묻히고 살 듯한, 이슬만 먹고 살 듯한 자태의 그 작가가 부모님 집에서 맞벌이하는 동생의 아이들을 돌본다는 사실이, 이미 몇 명의 다른 조카를 길렀다는 사실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방을 나누어 쓴 작가의 통통 튀는 건강함, 냉소적일 거라 여겼던 한 선생님의 따뜻한 면면, 추운가, 묻고는 달려 내려가 담요를 사다 주시던 한 선생님의 자상함, 농담만을 하다 어느 순간 홍조를 띠던 또 다른 선생님의 수줍은 얼굴…. 과연 우리는 내 이웃의, 내 동료의, 내 이웃 나라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모르고 살았는가, 깊이 반성하게 하는 일주일이었다.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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