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정부, 형 탈북시도 알고도 北 자극할까 소극대응 일관”

  • 입력 2009년 7월 22일 02시 55분


베트남전 실종 ‘월북자’ 분류된 형 ‘납북’인정 받아낸 안용수 씨
북한방송 나오자 월북자 분류
자료찾아 명예회복 끈질긴 노력
‘베트남전 국군포로’ 첫 인정

“그동안 ‘월북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속시원하면서도 지난 세월은 너무 억울합니다.”

안용수 씨(57)는 21일 자신보다 아홉 살 많은 형 때문에 43년간 ‘월북자 가족’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생각난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등으로 메마른 눈을 쓱쓱 문질렀다.

이날 국방부는 안 씨의 형인 안학수 하사를 베트남전쟁 국군포로 추정자 1호로 인정했다. 지금까지 국군포로는 6·25전쟁에서만 인정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달 국군포로대책위원회를 열어 베트남전 실종자인 안학수 하사를 국군포로 추정자로 인정했다”며 “현재 파악된 베트남전쟁 실종자는 안 하사를 포함해 4명인데 이번 결정으로 안 하사는 첫 베트남전 국군포로 추정자가 됐다”고 밝혔다.

재수생활을 하다 1963년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안 하사는 봉따우 201외과병원 통신병으로 근무하던 1966년 9월 9일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실종됐다. 이듬해 3월 안 하사가 북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자 이때부터 정부는 안 하사를 ‘탈영 월북자’로 분류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했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월북자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고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정보기관에 수시로 불려가 식구들의 동향을 적어 제출했습니다. 월북자 가족이라 남파 간첩의 접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형님의 실종 당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던 아버지도 아들이 월북자라는 이유로 퇴직 압력을 받고 결국 교단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형의 월북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안 씨는 형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방부와 통일부 민원실을 찾기 시작했다. 자비를 들여 베트남전 참전 국군포로에 관한 자료도 수집해 관련 부서에 전달했다. 그러나 안 씨에게 돌아온 것은 공무원들의 무관심과 냉대뿐. 2000년에는 “조사를 벌인 뒤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공문까지 받아냈지만 이후 8년 동안 안 씨는 정부로부터 연락 한 통 받지 못했다. 안 씨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포로가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북한을 자극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정부가 문제 해결에 너무 소극적이어서 실망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 끝에 안 씨는 최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안 하사가 1975년 북한을 탈출했다가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는 진술이 기록된 정부 측 문건을 입수했다. 1976년 북한에서 남파됐다가 자수한 무장간첩 김용규 씨의 진술을 담은 기무사령부의 문건에는 안 하사가 1975년 말 북한을 탈출하려다 북한-중국 국경선에서 체포돼 평양으로 압송돼 ‘간첩죄’ 혐의로 총살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안 씨는 “이는 형님이 북한을 탈출하려다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여태껏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얘기”라며 “아마도 ‘베트남전에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정부 입장을 스스로 번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사실을 숨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 씨는 이 문서를 근거로 정부 측에 안 하사의 병적기록 수정과 지위 회복을 거듭 요구했고 정부는 지난해 11월 베트남 현지 합동조사를 벌여 올해 4월 통일부 납북피해자위원회 심의에서 안 하사의 신분을 ‘납북자’로 결정했다. 국군포로 추정자인 안 하사는 만약 생존해 귀국하면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혜택을 받게 되며 사망해 유해가 송환되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월북자 가족으로 마음고생만 하시다가 2001년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께서 오늘을 보지 못하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다”는 안 씨는 정부와의 싸움이 아직까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형님은 ‘국군포로’가 아닌 ‘국군포로 추정자’로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추정자’ 꼬리표를 떼고 국군포로로 인정받고 다른 베트남전 실종자도 포로로 인정받는 날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안 씨는 22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통일부에서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안 하사의 국군포로 추정자 분류 등과 관련한 공식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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