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광장을 가다]<1>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 입력 2009년 7월 22일 02시 55분


佛축제의 열린 공간… 승전 감격도 월드컵 환희도 “오 샹젤리제”
드골-콩코르드 광장 연결
1880m 문화-역사 심장부
1902년 지하철 개통 후
명품매장 즐비 상업거리로
차량 통제는 한해 세 번뿐

《8월 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광화문 일대가 광화문광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광장 하면 시위를 떠올리는 한국의 현실에서 광화문광장은 새로운 문화공간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주요 국가의 광장은 시민이 즐겨 찾는 열린 공간이자 문화의 명소다. 동아일보는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를 비롯해 중국 러시아 미국의 유명 광장을 살펴보고, 시민 문화의 중심으로 거듭날 광화문광장의 바람직한 모습을 짚어보는 기획을 연재한다.》

세계에서 유명한 거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광장에서 오벨리스크가 있는 콩코르드 광장까지 1880m의 대로를 샹젤리제라고 부른다.

20일(현지 시간) 샹젤리제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 알롬 바르톨리 씨(27)도 여느 관광객과 다름없었다. 1880m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에 압도당한 듯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에게 샹젤리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묻자 “오 샹젤리제(Aux Champs-Elys´ees), 오 샹젤리제”라고 흥얼거렸다.

가수 조 다생은 ‘오 샹젤리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해가 비칠 때나 비가 올 때나, 정오나 자정이나,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샹젤리제에 있다.”

노랫말 그대로 샹젤리제에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 개선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카르티에, 몽블랑, 뱅앤드올룹슨, 푸조, 메르세데스벤츠, 리도 쇼극장, UGC 영화관, FNAC, 겔랭, 영화관 고몽, 버진, 디즈니 스토어, 시트로앵, GAP, 아디다스, 왼쪽으로 네스프레소, 휴고 보스, 카페 푸케, 루이뷔통, 오메가, 도요타, 나이키 매장 등이 있다. 그랑 팔레, 프티 팔레 등 박물관과 마리뉘, 롱푸앵 등 극장도 있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도 샹젤리제 쪽으로 정원이 있다. 또 샹젤리제 거리와 이어지는 조르주 생크 거리에는 최고급 호텔이, 역시 샹젤리제 거리와 이어지는 몽테뉴 거리에는 최고급 의류 명품 매장이 즐비하다.

샹젤리제에 가려면 지하철 1호선을 타야 한다. 샹젤리제가 오늘날과 같은 상업 중심지로 태어난 것은 파리 최초의 지하철이 들어선 1902년을 전후해서다. 1899년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카페 푸케가 문을 열었고 1912년 루이뷔통의 아르누보풍 건물이 들어서는 등 명품 매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샹젤리제는 모더니즘의 상징과 같은 장소가 됐다. 1917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벤저민 프랭클린 파크웨이는 샹젤리제를 모델로 조성됐다.

샹젤리제는 1994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을 거쳤다. 샹젤리제 상인연합체인 ‘샹젤리제위원회’의 홍보담당자 에리크 페나 씨는 “당시 샹젤리제에 퇴색의 기미가 보이자 샹젤리제위원회가 시라크 대통령의 후원으로 재정비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도시계획가 베르나르 위에, 건축가 노먼 포스터와 장 미셀 빌모트가 이 일을 맡았다. 미관을 위해 인도에는 큰 화강암 석판을 깔았다. 가로수를 바꾸고 미관을 해치는 간판에 대한 규제를 도입했다.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샹젤리제 상점은 야간과 휴일 영업 제한에서 예외를 인정받았다.

샹젤리제는 애국의 거리이기도 하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곳에서 승리의 행진이 있은 후 매년 7월 14일 독립기념일에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다. 1921년 1차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의 유골이 개선문에 안치됐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드골 장군과 르 클레르크 장군이 파리를 해방시킨 후 파리 시민의 환호를 받은 곳도 이곳이다. 1970년 드골이 사망한 날 밤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이 쏟아지는 빗속에 드골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걸은 곳도 샹젤리제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행진도, 1998년 프랑스가 월드컵에 우승하고 나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국민들이 몰려나온 곳도 샹젤리제였다.

프랑스에서 샹젤리제는 대체로 우파의 거리로 인식된다. 이 때문에 좌파는 바스티유 광장에서 나시옹 광장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하는 게 관례다. 그렇다고 샹젤리제가 곧잘 우파 시위의 무대가 됐다는 말은 아니다. 1968년 무질서의 반체제운동이었던 ‘68혁명’을 끝장내기 위한 드골 지지 시위 등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우파가 이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일은 거의 없다.

파리에는 많은 광장이 있지만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가한 광장은 별로 없다. 19세기 파리 개조를 담당한 오스망 남작은 대부분의 광장이 로터리(프랑스어 롱푸앵)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샹젤리제에 있는 샤를 드골 광장, 롱푸앵 광장, 콩코르드 광장도 마찬가지다. 늘 사람과 차량으로 붐비는 샹젤리제에서 교통 흐름은 통상 1년에 세 번 멈출 뿐이다. 7월 14일 독립기념일 군사퍼레이드, 자전거 경주인 투르 드 프랑스의 최종구간 경주, 12월 31일 제야 행사와 관련한 것이 전부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광화문, 휴식-문화 공간으론 부족”

파리정치학교 정수복 박사가 본 한국-프랑스 ‘광장’

“서울 광화문과 파리 샹젤리제는 모두 한 도시의 지리적 중심축이자 정치적 역사적 중심축이다. 그러나 광화문은 샹젤리제에 비해 상업성이 약하고 휴식과 문화의 공간으로는 부족한 게 흠이다.”

그랑제콜인 파리정치학교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정수복 박사(사진)는 파리 샹젤리제와 서울 광화문 거리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 박사는 곧 ‘파리, 도시 걷기의 인문학’(가제·문학과 지성사)이란 책을 국내에서 펴낼 예정이다.

―프랑스인에게 샹젤리제는 어떤 곳인가.

“샹젤리제는 파리를 동서로 가르는 중심축이다. 또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이 인접해 있고 콩코르드 광장 좌안(左岸·센 강을 기준으로 북쪽 우안, 남쪽 좌안으로 나뉨)에 하원 건물이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축이기도 하다. 19세기에 나폴레옹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개선문이 한끝을 차지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클레망소의 동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드골의 동상이 서 있다. 또 샹젤리제는 더 넓게는 왕궁이었던 루브르 박물관과 튈르리 정원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중심축이기도 하다.”

―유럽 다른 나라의 중심거리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

“프랑스는 대표적인 중앙집권적인 국가다. 파리는 프랑스의 중심이고 샹젤리제는 또 파리의 중심이다. 즉, ‘중심의 중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이곳에 몰려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영국 런던의 피커딜리 서커스나 트래펄가 광장은 역사적 정치적 의미가 약하다. 독일 베를린은 21세기에 가장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지만 지난 세기 냉전으로 분단돼 있어 발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 로마는 역사 유적은 많은데 과거에서 미래로 투사하는 힘이 약하다.”

―서울 광화문과 샹젤리제를 비교한다면….

“광화문은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기본축이다. 광화문 앞 세종로에는 정부중앙청사가 위치하고 있고 미국대사관 등 외교공관도 있다. 또 광화문은 무엇보다 조선시대 왕궁과 육조가 들어섰던 곳이다. 샹젤리제와 광화문은 모두 한 국가의 지리적 정치적 역사적 중심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샹젤리제와 광화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샹젤리제에는 그랑팔레 박물관, 마리뉘 극장 등 문화시설, 샹젤리제 공원 등 녹색공간, 레스토랑과 카페 등 편의시설이 고루 갖춰져 있다. 그러나 광화문은 상업성이 약하고 휴식과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관가인 광화문과 시장통인 종로가 분리돼 발전했다. 샹젤리제에서는 부르주아 혁명 이후 상업 공간이 성장해 옛 거리의 퇴락을 막아냈지만 광화문은 그런 식으로 발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샹젤리제뿐만 아니라 대부분 유럽 대도시의 중심거리가 상업성을 기반으로 발전해 온 것과 대조된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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