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눈치에 공기업 철밥통 깨기 한계

  • 입력 2009년 7월 21일 02시 57분


■ 공기업 선진화 1년… 얼마나 변했나
정원감축-초임인하 등 쉬운 과제만 진행
노조 협의 필요한 직원 임금조정은 손못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해외시찰’은 간부 교육프로그램의 단골 일정이었다. 적어도 2007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해외 일정을 모두 국내 수업으로 돌리면서 해외시찰은 입에 담는 것조차 거북한 단어가 됐다. 방만 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꼽혀온 외유성 해외출장도 없앴다. 수자원공사 측은 “지난해에만 교육훈련비를 포함한 각종 비용 절감액이 900억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런 노력 덕분에 수자원공사는 지난달 정부의 공공기관 평가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A등급을 받았다. 이 회사의 김건호 사장과 안병구 감사는 기관장 및 상임감사 직무수행 실적평가에서 각각 ‘우수’, A등급을 받았다.》

○ 선진화 1년, 의미 있는 변화들

정부가 공공기관 선진화를 추진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일부 공기업 내부에서는 수자원공사처럼 의미 있는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해외시찰이나 정년보장처럼 임직원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혜택들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모습이다.

한국전력은 철밥통을 깨는 인사(人事) 실험을 감행했다. 올해 초 모든 간부 사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개경쟁 보직제도를 통해 탈락자 52명에게 보직을 주지 않았다. 무보직 간부가 나온 것은 한전 설립 이후 처음이다. 한전은 이들을 대상으로 ‘리프레시(Refresh) 교육’을 실시했고 17명이 도중 퇴사했다.

강원랜드도 20일 전체 관리직급 109명 중 53명에 대해 무보직 발령을 냈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현재 교육을 진행 중이며 그 성과에 따라 보직을 다시 줄지 결정할 예정”이라며 “철밥통의 신화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긴장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광물자원공사 역시 지난해 8월 인사에서 실장 및 팀장급 간부사원 45명 중 9명에게 보직을 주지 않았다. 이 중 3명이 퇴사를 선택했고, 2명은 최근 인사에서 각각 팀장과 소장으로 복귀했다. 광물자원공사 관계자는 “나머지 무보직 간부들은 1, 2년 안에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퇴출된다”며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 그래도 아직은 먼 길

하지만 이런 현상은 일부 공기업에서만 발견될 뿐 전체 공공기관 선진화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는 평가다. 특히 정원 감축이나 대졸 초임 인하 등 정부가 제시한 8대 과제 중 쉬운 것만 받아들일 뿐 자발적으로 개혁에 나서는 공공기관이 많지 않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한전의 발전자회사인 한 공기업 간부는 “인턴 채용이나 기능 조정 등 정부가 하라는 선진화 과제는 모두 이행했다”면서도 “다만 사내에 큰 변화가 없어 개혁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관장을 포함한 임원, 대졸 신입사원의 임금은 대부분 깎았으면서도 ‘허리층’에 해당되는 기존 직원들의 보수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정부가 기관장 및 초임 인하를 주요 과제로 제시한 반면 기존 직원의 임금은 노조와의 협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강도 높게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장 의욕을 보였던 민영화 계획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해당 공기업 등 이해관계자들의 반발로 지연되고 있다.

공공기관 선진화를 주도하는 정부의 준비 부족도 아쉬운 대목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10월 ‘3차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서 밝힌 한국지역난방공사 상장 방침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가 지역난방공사의 주식을 상장해 지분 49%를 매각하겠다고 밝히자 지역난방 사용자들은 “지분 매각은 민영화의 시작이고, 민영화가 되면 열(熱)요금이 올라간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미 지난 정권에서도 지역난방공사의 지분 매각을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지역 주민의 반발로 무산된 전례가 있는 만큼 정부는 요금 인상 우려를 불식시킬 구체적 대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도 똑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것은 실현 가능성보다 가시적인 실적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 전문가 평가

‘의욕만 앞선 민영화’ 4점 그쳐

전문가들은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 중에서 민영화 부문이 가장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정부가 지난해 8월 1차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민영화에 가장 의욕을 보였지만 현재 이를 끝낸 곳은 한 곳도 없다. 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선진화의 방향에는 동의했지만 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2008 공공기관장 평가’에 참여한 7명과 한국공기업학회 회원 16명 등 23명의 전문가를 상대로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결과 정책의 방향에 대해선 86.9%가 동의했다. 하지만 선진화 속도에 대해선 매우 느림(8.6%)과 느린 편(52.2%)이란 응답이 전체의 60.8%를 차지했다.

8대 과제에 대한 항목별 평가에서는 지분 매각을 포함한 민영화가 10점 만점 중 평균 4점을 얻어 가장 부진했다. 실제 정부는 민영화 대상으로 선정한 29개 공공기관 중 농지개량, 안산도시개발, 한국토지신탁 등 3개 기관을 매각 공고했을 뿐 나머지는 아직도 준비 중이다.

나머지 과제 중 △노동교육원, 코레일애드컴 등 5개 기관 폐지 △한국가스공사와 한국방송광고공사에 대한 경쟁 도입 △131개 공공기관의 출자회사 정리 등 3개 과제도 각각 5점을 얻어 부진했다. 출자회사 정리는 131개 대상 기업 중 19곳만 완료했다. 정원 감축은 7점을 얻어 가장 후한 평가를 받았고 △통합 △기능 조정 △초임 인하 등 3개 분야도 각각 6점을 받아 보통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 23명

△김광희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수욱 서울대 경영대 교수 △김완희 경원대 경영학부 교수 △김준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김진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박명호 한국외국어대 경제학부 교수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신홍철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 △윤병섭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 벤처경영학과 교수 △윤태화 경원대 경영회계학부 교수 △이기환 한국해양대 해운경영학 교수 △이상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이우일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이종욱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 △이창양 KAIST 경영대학 교수 △이창우 서울대 경영대 교수 △이홍 광운대 경영대학장 △임채운 서강대 경영대 교수 △정규석 강원대 경영학과 교수 △조성일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인섭 조선대 행정복지학부 교수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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