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바이러스]<1>주홍글씨를 지워라

  • 입력 2009년 7월 20일 02시 56분


《2000년 대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30). 힘겨운 치료과정을 거치면서도 ‘지선아 사랑해’ ‘오늘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썼던 그녀.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 씨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격주로 소개한다.》

전신화상… 새 얼굴… 그래도 난 이지선

9년 전 대학 4학년이었던 어느 여름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23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화상과 병원, 수술이 일상이 되었다.

K대학병원 7층 맨 끝 병실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시작한 뒤로 난 ‘이지선’이라는 이름을 잃은 채 ‘Burn(화상)’으로 불렸다. 의료진들이 환자의 이름을 다 외울 수 없어 그 병명을 마치 이름인 듯 지칭해서다. 당시에 화상환자도 거의 없던 병원인지라 ‘번(burn)’이라고 부르면 헷갈릴 것도 없이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된 발음으로 ‘뻔’으로 불리는데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참 싫었다. 나를 나라고 증명할 얼굴피부도 다 잃었고, 그래서 피부 대신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나는 이지선이었다. 여덟 개의 손가락 절단으로 나만의 고유성을 보여줄 지문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이지선이었다. 그런데 ‘번’으로 불리는 순간 ‘사람’ 이지선은 사라지고 치료받아야 할 ‘화상상처’만 남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만난 병과 상처 앞에서 병명만 남은 ‘몸뚱이’의 주인이 되는 경험은 갑작스레 닥친 사고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사고 후 7개월이 지나서야 얼굴에 피부이식 수술을 받고,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새 얼굴’을 가지게 됐다. 새 얼굴을 대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그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사명을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처음으로 거울 앞에 섰고, 거울 속의 나 자신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새 얼굴의 나에게 다시 ‘이지선’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러나 얼굴 피부를 가졌다고 해도 여전히 화상환자였다. 자꾸 줄어드는 새 피부는 사방에서 당겨져서 점점 더 무서운 얼굴로 변해갔다. 웃어도 우는 것 같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스물네 살 나의 새 얼굴을 보고 한 꼬마는 ‘괴물’로 불렀고 또 한 아저씨는 ‘아줌마’로 불렀다.

사고 전 모습과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당시의 얼굴은 그저 동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쯧쯧쯧’ 혀를 차는 소리는 죽기보다 더 듣기 싫었지만 한국의 문화에서는 어쩌면 들어 마땅한 그런 얼굴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저러고 어떻게 사나, 나 같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만큼, 하늘이 준 생명을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얼굴이었는가 보다.

30여 차례의 수술로 이제 더는 ‘괴물’이라고 불리지도 않고 또 ‘아줌마’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는 나이에 슬슬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떼어낼 수 없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나를 소개하는 모든 말과 글에는 ‘불의의 교통사고’, ‘전신 55%의 3도 화상’ 같은 수식어가 ‘이지선’이라는 이름에 언제나 앞장 서 있다. 떼어낼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나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아직 ‘작가 이지선’은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기엔 좀 부족하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내년 5월이면 컬럼비아대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받겠지만 나는 여전히 화상환자이다.

졸업 후엔 박사과정에 들어가 화상치료만큼이나 길고도 어려운 유학생활에 다시 도전하려고 한다.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지긋지긋한 ‘화상’이라는 단어를 떼어내기 위해서다. 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면서 나를 설명하고 대표할 수 있는 ‘무엇’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 마음속에 그려본다. 더는 이름 석 자 앞에 지독한 운명과 화해하고 살아간다는 신파조의 긴 설명이 붙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나’로 거듭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오늘의 내가 앞으로 어떻게 불릴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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