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경기보다 먼저 선다

  • 입력 2009년 7월 17일 21시 36분


대표적 경기후행지수서 경기선행 바로미터로
“쌀때 사두자” 금융위기후 선제적 아파트 매입 급증
‘폭락후 바로 회복’ 10년전 환란 학습효과도 한몫

회사원 이 모씨(53·여)는 올 1월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 36㎡를 4억9000만 원에 샀다. 현재 아파트 가격은 7억 원 대로 가격이 올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 씨는 "경기전망이 불확실해 위험하다고 만류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인들 상당수가 구정 전후로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채은희 개포주공중개사무소 사장은 "12월부터 대기 수요자 100여 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가 올해 1월 들어 한꺼번에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했다"며 "고점 대비 40%가량 빠진 당시가 아니면 강남 입성이 어렵다고 판단해 대출을 받아 강남 아파트를 산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경기후행지수였던 부동산 시장이 변하고 있다. 경기가 좋아진 뒤에야 부동산 거래가 늘고 가격이 오르던 부동산 시장이 이번 금융위기에서는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도 전에 가격이 뛰면서 경기선행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 부동산 시장이 주식시장처럼 경기를 미리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상승에 앞서 먼저 부동산 산 사람 많아"

동아일보와 부동산114가 외환위기 직후와 지난해 터진 미국발(發) 금융위기 직후의 부동산 가격 변동률을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직후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나서야 부동산 시장 가격이 올랐다. 반면 이번 금융위기 이후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강남 지역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먼저 상승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회복될 때 주식→실물경제→부동산의 순서로 경기가 좋아지던 수순이 주식, 부동산→실물경제 순으로 바뀐 것이다.

지난해, 고점 대비 50% 가까이 가격이 곤두박질했던 강남 3구 등 버블세븐 아파트 가격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은 올 1월. 버블세븐 아파트 변동률(전달대비)은 지난해 12월 ― 2.54%에서 올 1월 0.04%로 돌아섰고, 이후 계속 상승해 6월 1.19%까지 올랐다. 강남 3구의 아파트 실거래량(신고일기준)은 지난해 12월 244채에서 올해 1월에는 1000채로 급증했다.

부동산 시장이 반등하기 시작한 1월은 경기 상황을 예측하는 데 쓰이는 경기선행종합지수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돌아선 시점과 같았다.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종합지수가 전달대비 플러스로 돌아선 것은 이보다 2개월 뒤인 3월이었다.

경기선행종합지수는 기업의 수주, 소비자기대지수 등 경기에 앞서 나타나는 10개 지표를 종합해 산출한 지수다. 이 지수가 전달보다 오르면 앞으로 경기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락하면 그 반대다. 경기동행종합지수는 생산, 도소매판매 등 실제 경기와 같이 움직이는 8개 지표를 종합해 만들었다. 이 지수가 전달보다 오르면 현재 경기가 상승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경기선행종합지수가 1998년 4월 플러스로 돌아섰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전국 부동산 변동률은 5개월 뒤인 9월에 들어서야 마이너스에서 벗어났다. 버블세븐 부동산 변동률도 1998년 8월 들어서야 0.97% 오르며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상승했다.

부동산114 김규정 부장은 "외환위기 이후에는 경기가 호전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던 반면 이번 금융위기 직후에는 경기 불확실성이 계속됐지만 투자를 먼저 결심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학습효과와 부동산 금융의 발달 때문

전문가들은 부동산 시장이 경기 선행적인 성격으로 바뀐 데는 외환위기로 인한 학습 효과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택가격은 여전히 고점 대비 20% 이상 떨어진 상태지만 한국 부동산 시장만 유독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도 주식처럼 저점에 투자해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경기가 상승할 것으로 믿고 부동산 가격이 저점에 달한 시점을 투자 적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부동산 시장이 경기보다 앞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금융의 발달로 부동산이 금융 상품화 되고 있는 것도 원인이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부동산 펀드나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참여하는 금융업체의 수와 투자금액이 크게 늘면서 부동산시장이 주식시장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김현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강남3구 아파트들은 대기수요자가 많아 금융상품처럼 손쉽게 거래가 가능해지면서 주식처럼 가격 변동성이 커지는 등 부동산시장도 점점 금융시장을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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