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소송에 치이고… 글로벌 경쟁시대 한국기업들은 지금

  • 입력 2009년 7월 17일 02시 56분


■ 국경없는 특허 전쟁

《국내 유명 사립대에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A 교수는 최근 미국 특허전문회사 인텔렉추얼벤처스(IV)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IV가 연구를 지원할 테니 미래의 특허 수익을 나눠 갖자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이를 승낙한 A 교수에게 IV는 5억여 원의 파격적인 대가를 지불했다. A 교수는 대신 미래에 발생할 특허 수익의 80%를 IV에 넘겨줬다. A 교수는 이 돈으로 10억 원 상당의 실험기기를 장만하고 아이디어 현실화를 서두르고 있다.》

美 거대 특허전문회사 아이디어까지 싹쓸이
로열티 물고 소송 당하고… 국내기업들 부메랑 타격
“특허펀드 등 대책 필요”

A 교수와 같이 IV에 아이디어의 권리 일부를 넘긴 사례는 최근 6개월 사이 한국에서만 268건이나 된다.

IV는 올해 안에 이를 800여 건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IV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상당수 싹쓸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대학에서 등록하는 연간 6400여 건의 특허 가운데 사업적 가치가 있는 것은 12.8%인 820여 건에 그치기 때문이다.

○ 잇따른 기술의 해외 이탈

IV의 한국 진출로 글로벌 특허전쟁이 국내로 번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에 진출한 IV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제너럴일렉트릭(GE) 등이 투자한 특허전문회사. 엄청난 양의 특허를 확보한 뒤 소송을 통해 특허료를 받아간다고 해 ‘특허괴물(Patent Troll)’로도 불린다. 50억 달러(약 6조4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며 한국을 비롯해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이미 최대 2만여 건의 특허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IV의 ‘한국인 아이디어 밭떼기’에 한국 정부와 기업은 발끈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올 4월경 각 대학의 계약 현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국가정보원까지 나서 기술유출 여부를 점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와 국내기업의 프로젝트를 통해 누적된 기술이 팔려나간다면 문제”라며 “당장에는 이들이 한국에 소송을 걸지 않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팔려나간 특허가 향후 국내 기업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IV는 삼성전자에 최근 펀드 공동 참여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참여하지 않을 경우) 귀사의 특허 침해로 발생한 수천억 원의 피해에 대한 청구 절차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휴대전화 특허 침해로 미국 특허전문회사 인터디지털에 각각 1억3400만 달러, 2억8500만 달러의 로열티를 이미 지불한 바 있다. 미국 특허 관련 단체인 페이턴트프리덤에 따르면 삼성은 지금까지 특허전문회사로부터 전 세계 기업 중 가장 많은 38건의 소송을 당했으며 LG도 29건으로 6위에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삼성전자는 최근 1년 사이에만 일본 샤프, 미국 코닥과 스팬션, 중국 홀리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당했다. LG전자도 미국 월풀 등과 50여 건의 특허소송이 계류돼 있다. 이런 위협은 엔씨소프트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 연구 성과 인정 않는 정부-기업도 문제

국내 특허의 해외 이탈은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이 연구 성과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은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A 교수는 통화에서 “한국 기업은 연구 성과물로 수조 원의 수익을 올려도 이익을 개발자와 나누지 않는다”며 “IV와 같은 특허괴물과 손잡은 교수들은 ‘국내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아이디어를 글로벌 기업과 함께 사업화해 외화를 획득하는 것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국 일본의 특허기술과 아이디어의 사업화 지원은 벤처캐피털에서 인벤션캐피털(발명자본)로 빠르게 진화하는데 우리는 특허 보호를 위한 자본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민관 합동으로 약 2조 원 규모의 특허펀드를 구성해 대응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청은 국내 특허펀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조만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 보고할 계획이지만 미국 일본에 대응할 만한 대형 펀드 구성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은 “불황기에 미국 등 선진국의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크로스라이선싱(상호 사용으로 특허료 상계)을 통한 ‘특허 알박기’를 피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며 “특허소송의 위협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