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비우면 당한다” 못믿는 여야

  • 입력 2009년 7월 16일 02시 57분


■ 사상 첫 본회의장 동시점거… 미디어법 처리 신경전
동시퇴장 ‘신사협정’ 파기
“한나라 직권상정 할라”
“민주 또 점거 할라”
양측 밤샘조 편성 철야농성

15일 오후 8시경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는 한나라당 의원 10명과 민주당 의원 2명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초선의 한나라당 권택기 의원이 멀찌감치 앉아 책을 읽던 재선의 민주당 양승조 의원에게 “양 선배님, 집에 가시죠”라고 말을 건네자 양 의원은 “허허” 웃기만 했다. 권 의원이 다시 “(양당 의원들이) 같이 나가고 본회의장 문을 잠그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지만 양 의원은 대꾸 없이 책을 봤다.

여야는 15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레바논 동명부대 파병 연장 동의안을 처리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미디어관계법 직권상정을 둘러싼 대립으로 김형오 국회의장의 산회 선언 이후에도 본회의장에서 퇴장하지 않고 점거한 채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여야가 본회의장을 동시에 점거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이날 본회의는 오전 10시 9분 시작됐다. 여야는 2시간여 만에 국회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 선거, 파병 연장안 의결을 마쳤다. 김 의장은 의원 10명의 자유발언이 모두 끝난 오후 1시 13분 산회를 선포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 각각 30여 명은 본회의장에서 나가지 않고 점거에 들어갔다.

여야는 8일 원내대표회담에서 15일 본회의를 열어 합의된 안건들을 처리한 뒤 곧바로 퇴장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양당은 각기 상대 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서로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신사협정을 파기했다. 여야는 이번 임시국회의 마지막 본회의가 열릴 것으로 보이는 23, 24일이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싼 격돌의 ‘D데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회기 마지막 날인 25일 토요일에 본회의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이날 양당은 각각 오전과 오후 의원총회를 두 차례씩 열어 상대 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할 경우에 대비한 전술을 논의하는 등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였다.

한나라당은 본회의에 앞서 민주당이 산회 직후 본회의장을 떠나지 않을 경우 자리를 뜨지 말라고 지시했다. 한나라당은 하루 50명 정도씩 3개 조로 나눠 철야농성을 하며 본회의장을 24시간 동안 지키기로 결의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올해 1월처럼) 민주당 의원들이 등산용 자일로 ‘인간 사슬’을 만들어 의장석을 점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민주당도 25명 정도씩 3개 조로 나눠 하루 3교대로 본회의장을 지키도록 했다. 한 의원은 “어제 저녁 원내대표실에서 오늘 본회의장 점거농성에 대비해 편한 옷을 입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우제창 원내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자리를 비우지 않고 저렇게 있으면 미디어법 처리를 강행할지 모르는 만큼 우리도 본회의장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와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이날 김 의장의 산회 선언 직후 만나 국회 정상화 문제를 협의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이 원내대표는 4주 동안 새로 임시국회를 소집해 미디어법 등을 논의하자고 요구했지만 안 원내대표는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려는 전술”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점거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데다 폭력시비가 일 경우 법안 처리 과정에서 명분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시국회 종료일이 다가오고 어느 한쪽이 국회의장석을 점거하려 하거나 상대 당 의원을 회의장 밖으로 밀어내려 할 경우 ‘폭력국회’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동아일보 사진부 김동주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김동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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