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전환파 “세수 부족 대비해야” 감세유지파 “소비-투자촉진 더 필요”

  • 입력 2009년 7월 16일 02시 57분


1기-2기 경제팀 시각차 노출
MB노믹스 주도권 다툼
“감세정책 초심으로 돌아가야”
재계도 침묵깨고 논쟁 가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법인세와 소득세의 추가인하를 유보하는 방안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정부 여당 내에서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감세(減稅) 논쟁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재정부 측은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원론적 의견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감세정책의 기조를 바꾸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당정 내부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 감세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감세정책의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부자 감세 vs 서민 증세(增稅)’라는 대결구도가 형성됐다. 》

특히 최근에는 윤 장관을 필두로 한 현 경제팀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디자인한 1기 경제팀과 미묘한 시각차를 드러내면서 MB노믹스의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인다.

○ ‘감세정책 철회’ 커지는 의구심

감세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인물은 윤증현 장관이다. 감세 기조의 후퇴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연이어 쏟아내면서 일련의 논쟁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13일 국회 재정위 전체회의에서도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 유보 의사를 묻는 질문에 “감세정책은 현 단계에서 변경할 생각이 없지만 경제정책상 상황 변화에 대해 가변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성역은 없다”고 답했다. 감세정책을 유지한다는 뜻을 밝히긴 했지만 방점은 ‘성역은 없다’는 대목에 찍혔다.

관가(官街)에서는 “윤 장관의 업무 스타일을 감안할 때 머릿속에 없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윤 장관이 평소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무엇보다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2월 취임 뒤 보건복지가족부 및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면서도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영리병원)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물론 재정부 당국자들은 “지난해 세제개편에 따른 감세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정부 방침은 변함이 없다”고 거듭 해명하고 있다. 현행 6∼35%인 소득세율을 내년부터 6∼33%로 낮추고, 법인세율은 11∼22%에서 10∼20%로 내리는 감세정책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세기조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계속 커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이 14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감세 및 강도 높은 세출 구조조정을 통한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이고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초심(初心)”이라며 “정부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 것도 이런 정황을 반영한 것이다.

○ 1, 2기 경제팀의 미묘한 시각차

당초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선진국에 비해 전반적으로 높은 세금 부담을 낮춤으로써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정체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를 재도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강만수 전 재정부 장관(현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대표되는 1기 경제팀이 지난해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법인세와 소득세 인하에 나선 것도 감세의 선순환 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기 경제팀의 핵심 멤버이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A 씨는 “지난달 말에도 대통령을 만나 감세기조 유지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했고, 대통령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들지도 않았는데 세금을 더 걷을 경우 투자와 소비에 찬물을 끼얹어 경기를 다시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경제위기 극복 이후 재편될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승자(勝者) 시대’를 열기 위해서라도 낮은 세율을 유지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현 경제팀은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크게 늘린 탓에 재정건전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올해에만 11조2000억 원의 세수(稅收)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이에 따라 재정적자 규모(관리대상수지 기준)는 지난해 16조6000억 원에서 올해에는 51조 원으로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같은 기간 국가채무는 308조3000억 원에서 366조 원으로 늘어나고 내년에는 400조 원 안팎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등 재정건전성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정치권은 현 경제팀의 이런 고민을 간파하고 ‘감세 유보’ 카드를 내밀고 있다. 야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의 일부 소장파 의원도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인하를 유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세제개편 때 법인세율을 13∼25%에서 올해에는 11∼22%로 내렸어도 투자가 살아나지 않은 점에 주목한다.

종합부동산세 인하, 3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 한시 폐지 등 부동산 관련 감세조치로 인한 정치적 부담도 이들이 감세 중단을 요구하는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세기조의 완전한 폐지는 현 정권의 ‘자기 부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감세기조 전환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감세정책 철회가 오히려 재정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경기침체로 국민소득이 큰 폭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감세정책이 보류되면 조세부담률이 크게 높아진다”며 “이는 잠재성장률을 둔화시키고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켜 국가 채무를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부자 감세… 죄악세…‘작명’이 본질 흐려
야당주장 먹혀… 정부 “과장 많아”▼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에게 밀렸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후반부에 판세를 뒤집은 것은 브랜딩과 작명(作名)의 힘이었다. 당시 클린턴 후보는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라는 짧은 슬로건 하나로 강적을 물리쳤다.

한국 정치권도 작명의 힘을 안 것일까. ‘부자 감세(減稅)’ ‘서민 증세(增稅)’ 같은 작명이 계층 간 편가르기를 부추기면서 세금 논쟁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은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 세제 개편 때 법인세, 소득세, 상속·증여세의 인하 방침을 내놓자 ‘부자 감세’라는 용어를 써가며 비판했다. 민주당은 최근 정부가 담배세와 주세를 올리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용어를 ‘부자 감세, 서민 증세’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담배세와 주세의 인상은 서민의 고통만 가중시킨다는 논리였다. 이후 여권의 일부 정치인들조차 ‘부자 감세, 서민 증세’ 슬로건을 여과 없이 사용하면서 야권이 설정한 ‘틀(프레임·Frame)’에 갇히고 말았다.

브랜드마케팅 컨설팅 전문가인 브릿지래보러토리 신병철 대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두 쪽으로 나누는 것”이라며 “야권은 이를 적절히 사용해 사실상 논쟁을 자기 쪽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권이 주장하는 대로 정부 정책에 ‘부자 감세’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법인세와 소득세, 상속·증여세 인하는 기업투자 활성화와 소비 증진을 통해 경기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지 부유층에 일방적인 혜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서민 증세라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세금을 더 걷을 여지는 별로 없다”며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세(Sin Tax)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논쟁이 가열된 것도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죄악세 개념은 세제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로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조세연구원 관계자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용어”라며 “이런 ‘개념’을 도입하겠다는 것이지 죄악세라는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美 오바마도 日 아소도 재정건전성 머리 싸매
지출축소-세수확보案 잇단 검토▼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세계 각국은 자국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쟁적으로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그 덕에 경제시스템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발생해 각국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회복할 방안을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15일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페이고(PAYGO·pay-as-you-go의 줄임말로 빚을 지지 말고 즉시 지불하라는 뜻)’ 원칙을 부활시키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경비를 늘리거나 감세를 실시할 때는 같은 해에 그만큼 세금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여야 한다.

미국 정부는 목표 달성이 부진한 사업의 예산을 삭감하는 한편 조세회피지역을 통한 세금 탈루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은 올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3.6%, 내년에는 9.7%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9.8%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영국은 해결책으로 증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연봉 15만 파운드(약 3억1400만 원) 이상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현재 40%에서 내년부터 50%로 올리기로 했으며 주류 및 담배 관련 세금을 인상해 2010년까지 30억 파운드의 세수를 확보할 방침이다. 세수 증대와 녹색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연료세도 인상했다.

국가부채가 GDP의 200%에 육박하는 일본은 사회보장제도 유지를 위해 소비세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헝가리 그리스 호주 등도 증세를 통해 세입을 확충하는 방안을 확정했거나 검토 중이다.

이에 따라 한국도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달 22일 “재정 균형을 회복하지 못하면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늪에 빠질 수 있다”며 “향후 3년간 지출 증가율을 연평균 0%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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