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백발의 슈퍼맨들 “우린 100살까지 현역”

  • 입력 2009년 7월 15일 08시 28분


첫 만남은 한화-히어로즈 전이 열린 6월21일 목동구장에서였다. 일일 턱돌이 체험에 나선 자리. 가면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흐릿한 시선 안으로 두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시구·시타자로 초대된 장기원(78)씨와 이동수(77)씨.

장기원 씨가 던진 공은 원 바운드로 포수미트에 꽂혔다. “할아버지, 오늘 (시구) 마음에 드세요?”, “아니, 잘 못 던졌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

“아마, 젊은 사람도 우리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걸?” 노(NO)노(老)야구단 박동석(60) 감독은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그럼 저도 한 번 가볼까요?” 즉석제안. “허허. 우리는 50세 이상만 가입이 가능한데…. 그럼 일단 우리 총무님한테 전화부터 한 번 넣어봐.” 7월5일 노노야구단의 청백전이 열린 서울 갈산초등학교를 찾았다.

○“50세 넘는다고 다 들어오나? 인성이 돼야지….”

“팀에 들어오려면, 일단 시험부터 봐야한다”는 것이 조관형(61) 총무의 첫인사. 규정보다 20년 일찍 입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 총무는 “노노야구단이 CF와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가입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약30명인 회원수를 무작정 늘릴 수 없기에 인턴십 제도를 도입했다. 인턴 기간에는 유니폼도 지급되지 않는다.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시나요? 프리배팅? 캐치볼?” 회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다른 거 안 봐. 인성(人性)이 중요하지.” 이동수 할아버지의 말씀에 모두들 끄덕끄덕.

주위를 둘러보니, 헬멧이며 방망이, 글러브를 주섬주섬 정리하는 50대 젊은이(?)들이 보였다. 저쪽에서는 그물망을 옮기는 60대도 있었다.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을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실력이 없으면 눈치! 금세 두 팔을 걷어붙였다.

○환갑의 홈런타자, “일부러 살살 친다니까.”

정식선수출신은 70년대 농협과 경리단에서 활약한 박동석 감독뿐. 하지만 펑고 받는 모습을 보니 모두 수비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박 감독이 3유간 땅볼을 날리자 유격수 이복영(61)씨가 백핸드 캐치. 물론 손시헌(29·두산) 같은 레이저빔 송구는 아니었지만, 공은 정확히 1루수의 가슴팍에 꽂혔다.

“어깨는 쓸 만 하던데.” 김종석(61)씨의 추천 덕에 백팀 3루수로 발탁됐다. 땅볼 하나를 가볍게 처리하고 뿌듯하게 웃었더니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세가 너무 높아. 첫 바운드가 크면 대시를 해야지!”

프리배팅을 시작하자 운동장이 작아 보였다. 좌측75m·중앙90m. 정식구장보다 작은 규모지만 그린몬스터 같이 높은 담장이 버티고 있어, 펜스를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인환(61) 부 감독의 타구는 연신 펜스를 직접 강타. 고 부감독은 “펜스 밖 차도를 지나는 차량에 공이 맞을까봐 일부러 살살 때린 것”이라며 웃었다.

○78세의 발야구, “산삼 드셨어요?”

경기 전 미팅. 백팀 주장 이복영씨가 타순을 정해준다. 9번까지 불렀는데도 이름이 없다. “저는요?”, “아, 깜빡했네. 10번 타자해. 수비는 4회부터야.” 타순은 12번까지. 자체 경기 인만큼 한 명에게라도 출전 기회를 더 주기 위해서다.

백팀 선발은 ‘최고령’ 장기원(78)씨. 청팀 선발은 ‘영건’ 김용주(만59)씨였다. 양 팀 모두 2회까지는 0의 행진. 3회말, 백팀 선두타자로 나온 장기원씨가 출루했다. 장기원씨는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가면, 무조건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타자는 계속 파울. “저 형님은 산삼을 드시고 왔나. 왜 계속 헛심을 쓰시지. 형님 도루 없다니까요!” 최고령자가 안쓰러웠던지 김종석(61)씨가 소리쳤다.

자체 청백전에서는 도루가 허용되지 않는다. 김종석씨와 홍성태(64)씨의 부상 때문에 규정이 바뀌었다. 슬라이딩을 하다가 다친 김종석씨는 왼쪽 연골 수술을 받았고, 홍성태씨는 오른발목에 철심을 박았다. 그래도 둘은 “상대팀과의 경기 때는 또 발야구”라고 했다.

○“야구나 인생이나,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나”

0-0이던 3회말 1사1루에서 들어 선 첫 타석. 투수와의 나이차는 딱 30세였다. 초구를 힘껏 때렸다. 공은 까마득히(?) 날아갔지만 파울. 파울홈런에 으쓱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다음 공은 맥없이 헛스윙. “힘으로만 하니까 상체가 들려.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조져!” 4번 타자 김석우(55)씨의 조언.

볼카운트 2-2. ‘침착하게’를 되뇌었다. 몸쪽 높은 공이었다. ‘안 쳐야지.’ 그런데 갑자기 공이 떨어진다. ‘어, 이건 뭐야. 쳐야 되나.’ 공은 그대로 스트라이크존을 통과. 낙차 큰 커브에 루킹(looking) 삼진을 당했다. 앞 타자들에게 “주자가 있으면 팀 배팅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지라 면목이 없었다.

풀이 죽어 벤치로 돌아오자, 윤영노(61)씨가 ‘본대장심탁명월수지명월조구거(本待將心託明月誰知明月照溝渠·마음을 바쳐 달에 의지하려 했지만 그 밝은 달이 개골창을 비출지 누가 알았으랴)’라는 한자를 적어주었다. “하나 쳤다고 우쭐했지?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항상 겸손해야, 항상 긴장할 수 있는 거라고.”

“어깨 힘을 키우기 위해 매일 고무줄을 당긴다”는 김용주씨는 청백전 사상 최연소(만59세) 완봉승을 거뒀다. 프로야구 최고령 완봉기록(한화 송진우·39세6개월22일)과는 20년 차.

○“언제 은퇴 하냐고? 100세!”

벌겋게 그을린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근처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반주(飯酒) 한잔 해야지. 우리는 주장(主將)이 주장(酒將)이야. 술로 뽑거든.” 조관형 총무의 말에 “하하, 그러면 제가 최연소 주장 되는 건가요?”라며 응수.

식사는 최근 방송에 출연한 강희중(72)씨가 ‘쏘기로’ 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잔 부딪히는 소리에 흥취도 더해가고. 기자도 술김에 물었다. “할아버지들. 왜 그렇게 (연세 드셔서까지) 야구를 하세요?”

“우리가 언제 젊어서 야구할 시간이 있었나?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경제성장의 주역이었어. 우리 때는 쉬는 날도 없이 일 하는 게 부지기수였지. 이 나이 먹으니까. 그제야 여한이 생기고, 꿈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한(恨)의 야구단이지. 하하.” 박희옥(69)씨가 토해 낸 얘기.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딱 20년 뒤에 정식 회원가입을 약속하고 나오는 자리. 그 때면, 최고령 장기원(78)씨는 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본다. “우리는 100세가 되면 은퇴하기로 했어. 그 자리를 자네가 메우면 되겠네.”, “할아버지, 그 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 저도 은퇴식에 꼭 오겠습니다.”

헤어지는 길. 또래 친구들이 지팡이를 들 나이에 그들의 손에 쥐어 진 것은 야구방망이였다. “난 오늘 한 경기 더 뛰어야 돼. 다른 팀에도 소속돼 있거든.” 인천 어딘가로 가야한다는 박민생(67)씨. 날씨가 좋으면, 어김없이 “Let’s play two(두 경기 하자).”를 외쳤다던 ‘시카고 컵스의 전설’ 어니 뱅크스(78)가 여기에도 있었다.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이 예전에도 있었다”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 “그 놈도 여기오라고 해. 하지만 인턴은 누구나 해야 돼.”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화보]전영희 기자가 간다… 노노 야구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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