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글로벌 어젠다 세터의 비밀

  • 입력 2009년 7월 14일 19시 58분


요즘은 ‘스마트(Smart)’가 대세다. ‘똑똑하다’는 긍정적 의미 때문인지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산업’처럼 이 용어를 여기저기에 끌어다 쓰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런 흐름에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기쁜 소식이 최근 날아들었다. 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기후변화 회의에서 한국이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지능형 전력망) 개발 선도 국가’로 지정된 것이다. 이는 기존 전력망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술로 20년 내에 390조 원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이 예측되는 차세대 성장산업이다.

하지만 보도를 접하고 ‘한국이 진정한 선도 국가인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 달 전 미국 뉴욕에서 만난 귀도 바텔스 IBM 제너럴 매니저가 던진 말이 귓가를 맴돌아서다. 글로벌에너지 사업을 맡고 있는 그는 “IBM 등은 몇 년 전부터 스마트그리드 사업을 글로벌 어젠다로 밀어 왔다”고 자랑했다. 그의 말에 따라 이 산업이 어떻게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슈로 부상했는지를 복기해 봤다.

이 분야가 글로벌 이슈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월 스마트그리드 프로젝트에 110억 달러(약 14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깜짝 발표를 한 이후다. 이는 관련 업체들이 모인 그리드와이즈얼라이언스(GWA) 회장을 맡고 있는 샘 팔미사노 IBM 회장이 오바마 인수위 캠프에 강력하게 요청한 내용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후 국내 언론에도 이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젠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IBM 등 미국 IT 기업들이 이 사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는 사실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IBM은 2006년 초 신(新)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이노베이션 잼(Jam)’에서 72시간에 걸쳐 15만여 명이 브레인스토밍을 한 뒤 이를 향후 주력사업으로 선정했다. 이후 다른 IT 기업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스마트그리드를 글로벌 어젠다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리고 마지막 방점은 오바마가 찍었다.

한국 정부는 거꾸로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로 3월 말 ‘국가단위 스마트그리드 구축사업’ 플랜을 내놓았고 이어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가 만들어졌다. 이 협회는 최근 미국 GWA와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겉모양새는 협력이지만 사실상 이미 10개의 민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미국의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겠다는 속내가 숨어 있다.

선도 국가가 어디인지를 가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서구 기업들이 치열한 기업가 정신으로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이를 글로벌 어젠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국 기업이 지향해야 할 좌표(座標)로 보여서다. 미국 정부도 이러한 노력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기업이나 국가가 선도자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추종자(follower)로 머물러 있다면 21세기 지식경제시대에 큰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선도자가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고 후발 진입자의 몫이 훨씬 많이 줄어드는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오른 몇몇 국내 기업이 이제는 글로벌 어젠다 세터(Setter)로 ‘위대한 도전’에 나서길 기대해본다.

박현진 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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