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6>

  • 입력 2009년 7월 14일 14시 02분


세 사람이 겨우 모여 앉을 수 있는 둥근 탁자와 의자 셋, 나무침대와 옷장이 전부였다. 벽은 누런 황토 그대로였고 천장에는 대들보가 드러났다. 도시 문명주의자 중에도 특별시 외곽에 따로 전통 양식의 별장을 짓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집일수록 내부는 최신 설비로 가득 했다.

석범은 발소리를 죽이며 의자 하나를 집어 들고 침대 가까이로 갔다. 의자를 놓고 앉아서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 손미주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마른 체형이지만 튀어나온 광대뼈엔 검버섯이 가득했으며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엔 피딱지가 앉았다. 죽음의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어……머니!"

신체 접촉을 피하라고 했지만, 석범은 미주의 뼈만 앙상한 오른손을 양손으로 덮어 쥐었다. '자연인 그룹'의 대모! 지구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예언가이자 단 한 번도 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는 시대의 토론가여!

열정으로 똘똘 뭉친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미주가 천천히 움푹 팬 눈을 떴다. 석범을 알아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슬쩍 손을 뺐다. 석범은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쳐다보았다. 고인 눈물을 그녀에게 보이기는 싫었다. 죽음 직전에 나눈 극적인 화해! 이런 식의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당겨 죽으려는 것이다. 석범의 부탁을 들었다면, 특별시로 와서 악성 조류독감인 페이빈(FAVIN, Fatal Avian Influenza) 치료제 토미플루(TomiFlu)를 투약했다면 지금부터 20년은 거뜬하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의지적 죽음'이다. 자식을 버리고 특별시를 떠났듯 자식을 버리고 죽음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자연 생태주의자로서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려는 것이다.

미주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석범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 가까이 귀를 댔다. 그녀의 입술은 겨우 2밀리미터 쯤 벌어졌다가 닫혔다. 가슴을 벅벅 긁는 탁한 기침이 쏟아졌다. 석범은 탁자 위에 놓인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치려고 했다. 미주가 놀랄 만큼 강한 힘으로 그를 밀어냈다. 석범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졌다.

"옮……아!"

미주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두 마디 뱉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미주의 잔기침이 호수의 파문처럼 정적을 깼지만 곧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 침묵의 시간이 석범을 조금은 냉정하게 만들었다.

"제 목소리 들리시죠? 몇 가지 확인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제 목소리 들리시면 눈을 뜨세요."

미주의 감은 눈은 움직임이 없었다.

"노윤상 원장이, 살해당했습니다."

그 순간 미주가 두 눈을 뜨고 눈동자를 돌려 그를 찾았다.

모르고 있구나.

"뇌가 사라졌습니다. 특이한 사실은 <보노보> 방송국 옥상에 시체가 옮겨졌다는 점이고, 로봇을 반대하는 노 원장의 유서가 공개되었다는 점이고, 노 원장의 외동딸이자 저와 맞선을 본 노민선이 노 원장의 시체를 끌어내렸다는 점입니다. 단답으로 가지요. 제 질문에 긍정이면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부정이면 두 번! 아시겠어요?"

미주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노윤상 원장을 아십니까?"

한 번.

"친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노 원장 환자 세 사람이 2016년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의 살인범이란 걸 아셨습니까?"

깜박임이 없었다. 꼭 감은 미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엉이 빌딩과 <보노보> 방송국 폭파와 같은 맥락으로, 그러니까 로봇과 인터넷 문화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연인 그룹'에서 그 세 사람을 죽였습니까?"

이전보다 빠르게 두 번.

"연쇄살인이 일어날 때마다 '자연인 그룹'에선 특별시 연합을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특히 '배틀원 2049'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공문을 수십 차례 주최 측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성명서나 공문만 보내고 '자연인 그룹'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죠?"

깜빡임이 없다.

흔들리는 마음 탓에 질문이 계속 길어지고 꼬인다. 짜증이 가득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정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한 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